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구판절판


목사님은 그때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든 창조설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만 창세기의 하느님은 어둠과 혼돈과 공허라는 질료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신다고,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일회의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일생에서도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라고‥. 이 기행이 내게, 혼돈과 공허 그리고 삶과 사람들에 대한 허무감에 싸여 있던 내게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내 어둠과 공허는 진정 창조의 질료가 될 수 있을까‥.-22쪽

하기는 종교뿐일까. 처음에는 신성하던 것이 세력을 얻고 나면 모두 본디의 그 뜻을 잃고 마는 것이 세상 이치인지‥. 써 놓고 보니 그게 어디 종교나 세력뿐이랴 싶다. 결국 사람이 그러한지‥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신 게 어쩌면 사랑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손수 옷을 지어 입히시고 앞으로 죽음과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예고해 주신 것이 사랑이었다는 그런 생각‥. 많은 것들을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 고통과 결핍은 가장 좋은 학교일 테니까. 안주하게 되면, 편안하게 되면 우리는 처음의 신성함을 잃고야 마는 그런 약한 존재일지도 모르니까‥.-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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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유모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백은실 옮김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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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창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이 유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도 유행에 편승하고 싶었던지 나는 도서관에서 덥석 그 책을 빌려왔다. 하지만 다 읽지는 못했다. 작은 글씨로 빽빽한 책장, 낯선 이름과 지명들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 ‘만화로 보는 고전’과 같은 류의 책들만 봐왔던 나는 그 책이 너무나도 낯설고 어려웠다. 이렇게 끝났던 시오노 나나미와의 만남은 올 해 들어 다시 시작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책이름이라 덥석 집고 나니,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었다. 잠깐 책을 훑어보니 흥미로웠다. ‘일단 빌려나보자’ 하는 마음으로 집에 와서 천천히 읽어보니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지중해를 둘러싼 지방의 인물들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재해석이다. 여기서 재해석이라고 하는 말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보통 우리가 역사상의 인물(엄격히 말하면 이 책에 다뤄진 인물 몇몇은 역사인물이 아닐 것이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실로 취급하는 기록들에 근거하여 개연성에 따라 구체화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글은 그 정의로부터 더욱 자유롭다는 것이다. 작가는 기록들에 드러나지 않은 정황을 그럴듯해 보이는 ‘상상’으로 채워나간다. 때문에,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우리가 대부분의 역사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작가의 상상에 의한 역사인물들의 일대기는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쉽게 수긍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특히, 그런 창작물들은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려 깊이 몰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 ‘정말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그럴 듯 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몇 가지 이야기는 ‘글쎄’ 라는 느낌도 들었다. 또, 익숙히 알고 있는 텍스트보다는 상상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이건 가짜야’라고 의심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예를 들어소설과 같은)이 엄격히 구분하면 가짜에 속하겠지만 읽을 당시만이라도 ‘이건 진짜야’라고 독자를 믿게 만들고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몇 이야기는 성공했고, 몇 이야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유쾌하기도 하고 흥미로웠던 책이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순간 멍해졌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보았지?’ 라는 느낌도 들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과 재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저 작가의 ‘잘 노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나온 것 같았다. 마치,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인 단테와 네로, 브루투스 등의 인물에 대한 기존의 이야기들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물을 독자의 의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기존의 역사가들은 결국 깜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와 같은 방어막을 많이 쳐놓았다. 때문에 독자는 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런 방어막들은 ‘이게 사실이야, 기존의 주장은 사실을 잘 몰라서 그래, 가짜야.’라는 위협으로도 들렸고, 내 상상은 그 방어막 앞에 가로막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은 후의 내 감상은, 잘 짜여진 일인극을 어두운 극장에서 혼자 보고 나온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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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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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1940년대만큼 중요한 순간은 더 없을 것 같다. 분단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고, 독재의 발판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고, 친일파는 이 시기에 사회 주류로 자리잡았다. 2005년 현재를 움직이는 사건들이 바로 194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이 시기를 되돌아보는데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만큼 좋은 책이 없는 듯 싶다. 물론, 이 시기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전문서가 있기야 하지만 대중들이 접할만한 수준의 책은 이 책이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훑다 보면 마치 내가 이 시대를 산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지나친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강준만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삼 그의 부지런함을 상기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1940년대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생각은 김구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승만의 노선이 아닌 김구의 노선대로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이 시대를 보는 나의 눈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한 정당은 백범기념관에서 행사를 갖기도 했다. 개혁세력을 표방하는 이 정당은 김구 선생의 휘호를 당사에 걸기도 했다.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조금 개혁적이다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 시기의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김구를 꼽는다. 나는 지금까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다들 김구일까 하는 생각을 아직까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강준만을 통해서 하게 되었다.

김구는 1948년 부터 암살당하기 1년 전까지만 남북연합 노선을 걸었다. 그 이전은 애매모호했다. 아직도 김구와 연관되는 '38선을 베고 죽을 지언정 단정에 참여할 수는 없다.' 라는 말과 함께 연상되는 분단을 막는 뛰어난 지도자로서의 김구의 모습은 최후의 1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물론 그 1년 여의 활약만으로 김구는 존경받을만 하다. 하지만 과연 김구만 그 노선을 걷지는 않았다. 김규식이 있었고, 여운형도 있다. 하지만 여운형은 좌파에 기울었고 좌파에 알르레기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풍속때문에 여운형을 지지 한다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안전하게 김구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강준만의 지적은 새롭고 일리가 있는 말인 듯 싶다.

이 시기는 극단과 분열의 시기였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노선대로 좌우합작을 보다 빨리 잘 실현했더라면 우리나라가 분단에 이르렀을 것인가. 중간파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우파고 좌파고 극단에는 답이 없다고 나도 믿는다. 합리적인 좌, 우의 대화와 타협에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1940년대에는 이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분단에 이른 원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여순사건과 4.3사건 등 해방후 좌익척결 작업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했는가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익이 좌익을 싸그리 죽였다고 해도 그 것은 천인공노할 일인데, 우익이 좌익만 죽인게 아니라 이념에 관심없는 민간인도 처참하게 죽였다는 것은 짐승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좌익의 우익에 대한 공격과 살해가 있었을 터이지만 대한민국 건국 후 이뤄진 이런 국가 차원의 학살에 비길 수 있을까. 우리가 제대로 된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비극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분명히 있어야 된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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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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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이다. 첫 문장부터 그녀의 표류를 있게 한 근원적 이유이자 그녀에게 가장 아픈 상처인 사실을 담담하게 털어놓고 있다. 제일 약한 부분을 처음부터 내보이는 화자가 나에게 더 이상 숨길 사실이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숨기는 것 없이 다 털어놓을 것 같았다. 그런 화자를 대하는 나는 왠지, 술자리에서 자신의 내밀한 부분까지 털어놓는 친구를 앞에 둔 것처럼 왠지 모를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궁금함을 가지며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과연,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매우 흥미로웠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할 때 나는, 시절이 어려웠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소설 또는 순수했던 화자가 세상과 접촉하면서 농익은 중년으로 변해가는 소설을 생각했다. 이 책에서도 라일라라는 소녀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 점점 나이 들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한 편의 성장소설로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에 와서 나는 이 책은 한 소녀의 성장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 개인의 성장이야기가 아니라 한 집단의 성장이야기 같았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세상의 올가미와 그물이 위협하는 황금 물고기인 라일라로부터 눈을 돌리니 수많은 황금 물고기가 라일라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라일라들’이었다. 라일라처럼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들도 또 다른 황금 물고기였고, 사회의 뒤편에서 가늘게 호흡하는 소수자들도 황금 물고기였다. 한편 아직도 식민 시대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일부 백인들, 소수자를 억압하는 지배자들은 황금 물고기를 가두려는 그물이며 올가미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라일라의 성장이야기라기보다는 라일라가 대표하는 각 세계의 소수자들의 ‘역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서구인들의 비서구인들에 대한 식민주의. 식민주의는 실패했지만 차별과 의식 속의 지배는 아직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의식 속에 존재하는 차별은 현실에서 다시 발현된다. 그 악순환. 서구인들의 비서구에 대한,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는 끝났다. 하지만 경제적 문화적인 지배는 계속되고 있다. 100 여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지배당해 온 그들의 경제와 문화는 식민모국인 유럽의 여러 나라에 종속되어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아직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흑인이나 유색인종이 많은 것이다. 우리가 산업화시대 때 농촌에서 서울로 옮겨 갔듯이, 일제강점기 때 출세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듯이 말이다. 하지만 식민모국으로 옮겨간 그들의 삶은 라일라가 목격한 자블로 거리의 흑인들의 삶과 일치한다. 그들은 뿌리 깊은 차별 속에서 식민모국인들의 공공의 적으로, 그들 사회의 하층민으로 자리 잡는다.

 

 르 클레지오는 이 소설을 통해 그 악순환에 대해 분명한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구인이 아니다. 백색 피부가 아닌 검은 피부의 소녀이다. 바로 이 사실만으로도 그 해답은 찾을 수 있다. 피지배자,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본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장 빌랑이라는 프랑스인 교수는 라일라와 함께 힐랄 부족의 마을로 들어간다. 나는 이 장 빌랑이 바로 작가 자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장 빌랑은 작가만은 아니다. 장 빌랑은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의식 속의 차별을 간직한 서구인,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백인만이 지배자는 아니다. 우리도 의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소수자에 대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저지르는가. 외국인 노동자들, 혼혈아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식민주의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장 빌랑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라밀라가 도착한 마을은 라밀라만의 고향인가? 아니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도착해야 하는 마음속의 고향이다. 현실 속의 차별과 억압을 부정하고, 또다른 ‘라밀라들’의 손을 잡고 함께 도착해야 할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작가가 바라는 세계도, 내가 바라는 세계도 그곳에 있다. 라밀라가 말한 사랑의 시대는 바로 그 고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라일라들’의 손을 잡고 그 고향으로 가야한다. 다소 계몽적이고 공익광고 같은 것이지만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얻은 결과이자 교훈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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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청목 스테디북스 71
다니엘 디포우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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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소는 '에밀'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읽혀야 될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꼽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주위로부터 로빈슨 크루소가 소위 세계명작이라는 이유로 읽기를 강요당해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않다고 나는 최근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은 후에 바로 드는 생각은 이 책이 왜 세계명작일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가치를 갖는 것은 높은 문학성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가지는 의미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중류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편안하다고 충고하는데도 불구하고 모험을 떠나는 로빈슨의 모험심이 아이들에게 주는 좋은 영향 때문에 소위 세계명작으로 지속적으로 읽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로빈슨 크루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진출 시대에 뒤이은 영국의 해외 확장 시대와 맞물려서 출판되었다. 그만큼 이 책은 당시 영국인들의 확장주의와 그에 따른 자신감, 모험심 등을 담은 시대적 산물이다. 로빈슨이 무인도에 살게 된 이유도 흑인 노예를 수송하는 일을 하러 아프리카로 가다가 생긴 일이었고, 로빈슨이 하인으로 삼는 프라이데이 또한 백인에게 충성스러운 흑인 노예를 표상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당시 시대의 서구확장주의와 서구인의 자신감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의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문화다원주의가 대두되고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21세기에 이 책이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본다.

또 하나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에 대한 것인데, 이 책의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끊임 없이 생산해 낸다. 섬에 혼자 남겨지면 고독감에 지쳐버릴 것 같은데 로빈슨은 그렇지 않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섬에 홀로 있으면서도 고독에 대해서 깊이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고 했는데 생계를 위한 생산만 충족된다고 살 수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심과 굳센 의지, 독립심, 자신감은 읽는 이에게 감동과 희망 그리고 교훈을 주겠지만 너무 인간같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로빈슨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도서출판 청목'의 번역본에 대해 너무 실망스러웠다는 점이다. 오자가 너무 많았다. 오자 한 두 개 정도는 실수로 봐줄 수 있지만 너무 잦은 오자는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무리 저렴한 가격의 문고본이라도 품질은 일반 서적에 뒤떨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출판사의 배려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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