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 간신에 대한 하나의 '논의(論)'였다. 그동안 간신을 단지 '나쁜놈'으로만 인식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간신을 하나의 사회·역사 현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의도는 책의 처음에서 끝까지 나타나고 있다. '사회·역사 현상으로서의 간신'에 대해 조목조목 분석하고 간신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마지막으로 간신의 전횡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놓으려 한 저자의 노력은 돋보였다.하지만 '사회·역사 현상'으로서의 간신을 파악한다는 의도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양은 많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자는 <간신론>을 통해서 간신에 대해 철저히 해부하고 간신을 식별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과제에 이 책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작가의 원대한 뜻에 비해 간신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이 너무 원론적이고 너무도 당연하고 상투적인 '공자왈 맹자왈'식의 결론으로 끝이 나 아쉬웠다.끝으로 이 책의 기획 의도에서 말했 듯, '수많은 간신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간신에 대한 책이 주는 의미는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은 피지 않는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도 유효할 것 같다.
우선 눈길을 끈 것은 '학문이 즐겁다'는 책의 제목이었다. 물론, 원제는 '학문의 발견'이지만 어렵고 지겹게만 느껴지는 학문을 발견한다거나 학문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말은 세인들에게 비슷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은 나의 기묘한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렇게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스스로 평범하다고 느끼는 한 수학자가 학문을 왜 하는가, 자신은 어떻게 해왔는가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그런 생각들이 저자의 성장 과정에 녹아 있기 때문에 저자의 자서전 같은 느낌도 든다. 우리가 어렵고 지겹게만 느끼는 학문을 왜 해야 하는가? 저자는 학문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지혜라는 것은 어떠한 대상을 남들 보다 쉽게 또 깊이 이해하고, 어떤 것을 결정하는데 결단력을 가지게 하는 무형의 재산이다. 하지만 지혜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배워야 하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는 없을까? 우리의 인생은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이 창조의 원동력은 배움이기 때문에 창조를 위해서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창조는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의 사소한 창조, 사소한 발견도 포함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창조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삶에 녹아 있는 도전과 노력의 과정도 흥미롭게 그려있다. 평범하므로 남들 보다 두 세배 더 노력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저자가 몸소 보여주는 듯 하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결코 지겨워하지 않고 '즐거움' 마저 느끼는 저자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평범한 저자의 성공 이야기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타가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이다. 새로 개정하면서 오타를 많이 수정했겠지만 오타가 생각보다 자주 눈에 띄어서 신경이 쓰였다. 이 점은 출판사에서 지속적으로 수정해갔으면 한다.
이 책의 논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째는 '노무현과 조선일보가 싸우는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라는 측면이고 둘 째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선일보가 노무현을 어떻게 죽이려고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해야하는가'의 측면이다. 그동안 조선일보의 추한 모습을 다룬 서적은 많이 있었지만 이 두가지를 복합적으로 서술한 책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보여준 유시민의 노력은 일단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은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므로 서로서로 양보해라고 다독이며 중간자의 입장에 서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우리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할 수 있는 역할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더 비상식의 편에서 벗어나 상식의 편으로 데리고 오는가다. 그 역할을 위해서 유시민은 공정하게 편파적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자칫 모순된 말로 들리는 이 말은 자세히 살펴보면 백 번 옳은 말이고 이 책의 마지막까지 이 입장은 견지된다. 유시민은 노무현과 조선일보와의 싸움 그리고 '조선일보'에 대한 일부 비판 여론은 진보 대 보수의 단순한 대결로 보지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일보'에 보수 정론지라는 딱지를 씌워주는 것은 분에 넘치는 대우이다. 유시민에게 '조선일보'는 구체제의 대표로서 구체제의 또다른 축인 한나라당과 결탁한 추한 신문이다. 조선일보는 정권에 쓴소리하는 정도(正道)언론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춰서 정권까지 만들려는 사도(邪道)를 걷는 언론이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의 광고 카피대로 그야말로 '신문 이상의 신문'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 책을 보다보면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바보' 노무현만 하고 있는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상식의 편에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해야할 '성전'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 싸움이 전 국민과 조선일보의 싸움으로 확대되기 그 이전에 언론 이상의 역할을 하려는 조선일보가 언론으로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빠르고 현명한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악의 축으로 칭하면서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으로 사담 후세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때에 적절하게 출판된 서적으로 관심을 가져 왔다. 사실 이 책은 사담 후세인에 대해 전문적으로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서적이다. 저자인 김동문씨도 서아시아 지역과 이슬람, 무슬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동안 관련된 여러 책을 써온 분으로 이 책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사담후세인 - 위대한 영웅인가, 극악한 테러리스트인가' 라는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담 후세인에 대해 저술하려고 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언론은 걸프전 이후 미국의 입장에서 '악의 축 국가'의 '극악한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것을 어느 정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들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에 대한 우리들의 여러가지 오해들을 불식시키기 위해 아랍인들의 목소리도 들어가면서 중간자적 입장에서 쓰려고 노력한 것 같다. 작가는 우리의 사담 후세인에 대한 인식이 어디선가 전해 들은 '악의 화신'의 이미지로만 굳어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가 한 인간에 대한 인식이 이 부부은 좋고, 이 부분은 나쁘다고 복합적으로 인식하고 있듯이 사담 후세인도 복합적으로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최대한 직접적으로 사담 후세인과 대면할 기회를 작가가 제공하려고 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나'와 '너'로서의 우리와 사담 후세인의 만남을 이 책이 주선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이슬람의 시각과 미국의 시각을 공평하게 제시하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한 점은 평가할만 하지만 너무 잦은 오타와 ' ' 같은 인용부호를 생략한 곳이 많아서 독서의 몰입에 방해가 되고 있다. 작가의 좋은 의도와 노력이 편집상의 실수로 인해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한, 제목이 사담 후세인인 만큼 사담 후세인에 대한 깊이 있는 서술이 있었으면 했지만 사담 후세인에 대한 서술이 너무 간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사담 후세인은 비밀 속의 인물이라 피상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쉬운 부분의 하나다. 차라리 이 책의 내용에 맞는 제목이라면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 그리고 이라크인'이 나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서울의 책상 위에 앉아서 참고 문헌을 뒤적거리며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에 대해 서술하지 않고, 이라크인들과 직접 부딪혀가며 서술하려고 노력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나는 또는 우리는 '민족 공동체 의식 함양 글짓기' 등을 할 때 빠지지 않았던 글귀는 '단군의 자손으로 같은 핏줄인‥' 이었다. 그리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라고 했던 맥아더 장군의 전기를 읽으며 존경해왔다. 그 뿐인가. '야인시대'를 보며 열광했고, C신문이 민족지 운운할 때 맞다, 맞아 하며 고개를 끄떡엿다. 그리고 노근리 학살 사건이 대두되었을 때 전쟁중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쉬쉬했다. 나는 또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런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이 틀을 깨려고 하면 당황하고 불안해하며 그들을 배척했다. 세상을 쉽게 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좋은 것은 사실이다. 저렇게 알고 바꾸지 않으며 살아가도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사를 접한 것은 실수였다. 지금까지 '교과서적 심성'으로 갈고 닦았던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와 모든 상식이 깨졌다. 모두 깨지는 못하고 어떤 부분은 견고하게 남아서 오히려 '새로운 역사'를 위협하고 있기도 하지만 단단하게 묶여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지식들에 금이 갔고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우리가 이런 역사를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하고 '교양역사서'에서 배우는 것은 슬픈일이다. 그리고 이 책을 진짜 역사서라고는 볼 수는 없다. 한홍구 교수의 대중을 위한 사론(史論)이고 역사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부담없이 편한 마음으로 읽다 보면 닫혀있던 인식의 틀을 상당부분 바꿔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책이 당당하게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다'라는 등의 도발적인 비유가 존재하고 감정을 흔들어 놓는 섬뜩한 사진들이 존재한다. 그런 면이 자칫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그리고 모르고 있었던 역사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보고 싶다. 우리가 이 책을 접하고 처음 내뱉는 말은 '위험하다', '보지 말아야 한다'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그런 생각을 유지한다면 그 것 만큼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