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박물관
아라리오뮤지엄 엮음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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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은 인생의 시계를 멈춰버리게 한다. 시간은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 뒤로도 옆으로도 빗겨가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과의 만남이 끝나버리는 순간 기찻길이 끝나듯 더이상 길은 사라진다. 


reset

단지 한 존재가 사라진 것 뿐인데 내 인생의 카운트는 0000. 구식 녹음기의 계기판처럼 reset. 내게 방법은 끊겨버린 선로 위에서 망연자실 서있거나 다른 선로에서 새롭게 시작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다. 대학때 내가 좋아했던 그 누나는 알바를 하던 호프집 사장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와 싸우고 이별을 직감하던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방엔 그 사람이 놓고간 가게에서 쓰던 의자가 하나 있었어. 둘 데도 없고 뭔가 썰렁한 내 자취방에 어울리겠다 싶어서 그 사람이 그냥 갖다 놓은거야. 처음에는 거추장스럽기도 했고 좁은 방에 어색하다고도 생각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의자가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시작했어. 어떤 날 크게 싸우고 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아. 아직 의자가 있지. 이것만은 가져가지 않았지. 그럴 때 나는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울고 또 울어. 그리고 마지막엔 적어도 한 번은, 그가 의자를 가지러 올거라고 생각하곤 했어. 나에게는 그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몰라. 
결국 그는 떠났다. 의자를 가지러 한 번은 올 것이라던 누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의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 그녀에게 희망의 끈이었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아마 '끝'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앞에 존재하는 그 사물을 보면서 그 사람의 존재를 믿고, 이별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 만약 그녀가 '실연의 박물관'을 알았다면, 이제는 그 의자를 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생각해냈는지 '실연의 박물관'은 꽤 근사한 발상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라는 박물관이 실제 있으며,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수집한 실연과 관련된 사물 82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 물품들은 지난 2월부터 3월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전시를 마치고 자그레브에 있는 박물관에 영구 소장된다고 한다. 물품 중에는 남녀간의 이별을 상징하는 물건이 많지만, 그 외에도 부모님과 이별, 남편과의 사별, 애완견과의 이별까지 모든 이별의 흔적을 다루고 있다. 

이별의 상징만을 모아 놓은 책. 을 상상해 본적이 있을까. 하나의 큰 이야기가 하나의 이별 봉우리를 향해 진행되는 게 보통의 책이라면, 이 책은 작은 봉우리가 82개 있는 산이다. 능선을 넘어서 정상인가 싶으면 다시 내려가고, 이전의 봉우리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또다른 언덕을 만들고 있는. 특별한 묘사도 세련된 기교도 없는 일반인들의 글이지만 꾸미지 않아서 더 와닿고 애잔하게 감성을 건드린다.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무덤 앞에서도 숙연해지는 것은 그를 다시 볼 수 없어서 슬퍼할 누군가의 아픔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기증된 이 물건들이 상징하는 것은 '無'이다. 존재함으로써 무를 증명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실연의 박물관이 갖는 또다른 의미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마땅할텐데, '없음'을 '있음'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무척 쓸쓸하게 만든다.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의 부재가 메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물의 존재는 사람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다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실연의 박물관'을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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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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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균,쇠가 우리에게 제시한 여러 메시지 중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왜 어떤 지역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발전이 이뤄졌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분석이었다. 그 의문은 이 책의 제1장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가'라는 주제와 같다. 우리가 못사는 나라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곳은 단연 아프리카이다. 거기 국민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길래, 1년에 여러번 수확할 수 있는 기후환경을 가지고, 천연자원도 충분한 그곳에서도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특별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닌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다. 그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지리적 요인과 제도적 요인을 살펴야 한다고 한다. 


특히 지리적 요인은 온대 지역이 열대 지역보다 부유하다는 사실을 수치로 확인시켜 준다. 이는 국가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내에서도 온대지역인 북동부가, 열대지역에 가까운 남동부보다 훨씬 부유하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재레드 교수는 그 이유를 열대지역의 낮은 농업생산성과 취약한 공중보건으로 분류한다. 열대지방이면 당연 농업생산성이 높아야 하지만, 토양이 지나치게 박토인데다, 너무 다양한 동, 식물, 병원균과 벌레 등으로 곡물이 잘 자랄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열악한 공중보건이다. 잠비아의 경우도 각종 기생충과 말라리아, 에이즈 등으로 인해 평균 수명이 41세에 불과하다. 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조건이라는 것은 바꿔말하면 인간에게 해로운 생물에게도 유리한 조건이라는 의미가 된다. 평균 수명이 41세라는 의미는 교육이 끝난 30세에는 사회에 기여할 기회가 고작 10년 남짓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나라에서 정년까지만 하더라도 30년을 기여하는 셈이니 열대지방의 사회적 재원의 손실이 어느정도인지 알만하다. 더구나 영아 사망률이 높으니 여성은 아이를 많이 낳아야하고, 그들은 자연스레 경제 인구에서 빠지게 된다. 저자는 그 외에도 육지로 둘러싸인 지리적 요인, 천연자원의 저주, 그리고 제도적 요인까지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다.  

모든 장이 재미 있지만 6장 '건강하게 삶의 질을 유지하며 오래 사는 법'은 왜 서구인들에 비해 비서구인들이 서구식 음식으로 인한 성인병이 많은가를 설명해 준다. 뉴기니의 와니겔라족은 50년 전만 해도 당뇨병 환자가 한 명도 없었지만 지금은 37%가 당뇨 환자이다. 이는 오히려 이탈리아보다도 7배나 높은 수치인데, 서구식 식단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지나치게 높은 수치이다. 과거의 뉴기니 인들은 염분이 무척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그 양이 지극히 미량이라 평균 섭취량은 50밀리그램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먹는 빅맥 햄버거에는 무려 1.5그램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뉴기니 인의 한달 섭취량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염분을 비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살아 남은 적응 존재들은 이제는 불필요한 염분을 축적해 성인병을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책이 인기 있는 이유는 우선 발상이 신선하다. 뭔가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사실들에 대해 색다른 이유를 들고 오지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읽다보면 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음에 나오는 주제도 '중국은 세계 1위가 될 수 있는가' 같은 큰 주제에서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같은 개인적인 주제까지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주제에 비해서 내용이 빈약한 면이 없지 않다. '중국은...'의 주제나 '개인의 위가와 국가의 위기...'만 봐도 결론 부분은 다소 허무하고 성급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개괄적인 생각을 알기에 적합한 책이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읽을 거리도 있으면서 분량이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읽기에 알맞다. 책의 마지막엔 8가지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짤막한 답변이 달려 있는데,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 함께 우리에게 함께 고민할 숙제거리를 남기고 마무리 된다. 7장에서 밝히듯 우리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기후' '불평등' '자원'의 문제로 요약된다. 어느 하나 소수의 사람의 획기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는 없다. 같이 생각하고 같이 풀어나가야할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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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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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열쇠가 자물쇠보다 먼저 도착하기도 한다.'(p.15)

그녀 앞으로 살구 45킬로그램이 배달되어 온다. 그녀는 그것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종이를 펼치고 그 위에 살구를 가지런히 늘어 놓는다. 한 나무에서 난 것이지만 어떤 것은 너무 많이 익어서 썩으려는 참이고, 어떤 것은 푸른기가 가시지 않은채 막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해야할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그녀가 간직해온 비밀같은 수수께끼들이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도, 이제 막 시작하려는 풋풋한 이야기도 모두 한 나무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 살구는 그녀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30년을 살던 집에서 따온 살구이다. 이제 그녀는 살구알을 하나 하나 정성스레 골라내며 잘못 풀려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다시 되돌리는 중이다. 


한 권의 책으로 엮였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썼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한 가지에서 났어도 모양이 다른 살구처럼 각각의 색깔을 가진다. 그것은 이야기야말로 하나의 인위적인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럼 없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야기의 초반부에 그녀는 동화 이야기를 꺼낸다. 동화라. 동심 이야기겠지? 라고 생각하다 보면 그녀의 생각은 그렇다. 동화의 주인공. 아무런 힘도 없는 주인공, '다른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힘을 행사할지언정, 정작 자신은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주인공이다. 그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를 돕는 인물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녀에게 어머니는 힘없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아닌, 그녀를 비극의 중심에 세우는 마녀의 역할이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어머니를 이야기 할 때 그러한 과거를 빠뜨린다면 그녀는 영영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지극히 감정적이었으면서도 '공정함'을 맹신하고, 딸의 성장에 대해서도 질투하며, 머리칼마저도 금발인 것을 허락치 않았던 어머니였다. 그녀는 정작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 비로소 어머니를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와의 간극에서 저자는 성장하면서 외로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이제 둘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고 오직 목소리와 얼굴만 남아서 간호하는 이와 간호받는 이의 사이가 되자 오히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녀는 20대 시절 항상 자신을 억누르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거역하고, 그랜드캐니언을 따라 래프팅을 해보겠냐는 제안에 '네'라고 답해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그것은 실현되었건 아니건 어머니의 목소리를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발을 내밀던 그녀의 첫 순간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보물을 거절한 듯한 느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지닌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p.59)

시간이 지나 이제 살구는 작은 유리병 안에 절여져 있다.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유리병 안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녀는 살구가 담긴 두 개의 유리병을 보면서 그것은 마치 받아 적은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면, 그리하여 그 글들이 유리병 속에 언제고 시간을 지키며 담겨 있다면 이제 그것은 더이상 나를 괴롭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저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때로 다르게 보여질 수 있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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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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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책117p, 출처 위키디피아]


2년 전 프랑스의 한 다락방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림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의 진위 여부가 최근 밝혀졌다. 이 그림은 실제 카라바조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더 정확한 감정을 위해 이 그림을 30년간 국외 반출 금지 시켰다. 실제 이 그림이 진품으로 판명난다면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을 사들일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 그림의 가격은 무려 1,570억이다. 잭슨폴록의 그림이 1,468억이니 이 그림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알 법도 하다. 사실 카라바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거의 전시회가 열린 적이 없을 정도로 그림이 고가이다. 그림을 판단하는 기준이 거기에 매겨진 가격이라고 생각하는게 얼마나 무식한 방법인줄 알면서도 나는 도무지 가격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은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작품이 나타내는 화가 자신의 환경과, 주변 여건에 따라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작품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의 그림이 대단한가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물음이 되겠다. 저자는 단순히 기술적인 설명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기술적 차이가 이전의 화가들에게서 볼 수 없던 어떤 특이점을 가졌는지 설명한다.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카라바조가 다른 화가들과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다. 가장 특이한 기술적 차이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알라 프리마 방식'이고, 두번째는 '테네브리즘'이다. '알라 프리마' 방식이란 16세기 베네치아 출신 화가들이 기초도안이나 밑그림 없이 바로 채색하는 방식을 말한다. 카라바조는 평생 도안 없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르네상스 작가들이 '회화는 내적 디자인을 표현하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했던 당시의 '미학이론'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완벽한 그 무엇'을 미리 상정하는 기존의 가치에 대한 철저한 반발이었다. 이를 그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활동이 바로 형이상학적 모든 가치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테네브리즘'이라는 방식은 빛과 어둠의 극명한 차이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을 강조하는 극적인 표현 방식을 말한다. 이는 특히 이중적 특징을 보인 카라바조 그림의 상징적인 특징이다. 롬바르디아의 '자연주의 미술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의 그림 배경이 암흑으로 그려지는 가장 큰 이유이다. 위의 그림에서도 등장인물의 외부 색상은 어두운 색으로 채색되어 유디트의 단호하면서도 겁에 질린 표정과 홀로페르네스의 비극적 표정이 부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방식을 극대화한 카라바조의 뒤는 이후에 렘브란트 같은 대가가 이어받으며 그림의 3차원적 깊이를 부여한다. 


카라바조가 스무 살 무렵이 되었을 때 그는 로마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며 감탄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림들이 추구하는 바는 한 가지였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으로 강력하게 몰아치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고취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화풍을 흉내내는 매너리스트들과는 달리 카라바조는 그만의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 나갔다. 그가 만든 고유한 영역은 이후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리베라 같은 대가들에게 전승되면서 17세기 유럽 미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림의 방식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카라바조의 독창성은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인간의 욕망을 배제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키고자하는 가치를 우선적으로 드러내면서, 정작 인간에 대한 진실한 접근은 소외시켰다. 그에 반해 카라바조는 '카드놀이 사기꾼'이나 '점쟁이 집시' 같은 그림처럼 일상의 소재를 채택해 그림을 그림으로서 그만의 독특한 바운더리를 형성한다. '도마뱀에 물린 소년'을 통해 동성애적 암시를 주거나, '병든 바쿠스 신'을 그릴 때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고, 막달라 마리아를 그리면서 거리의 창녀 필리데의 모습을 그려넣는 식으로 '성(聖)'과 '속(俗)'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한다. 소재의 선택은 '성(聖)'스러우면서도, 제재나 주제의 선택은 '속(俗)'스럽게 표현하면서 이 둘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킨다. 


카라바조의 성공은 그의 광적인 행동 때문에 여러차례 위기에 직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매장'으로 일약 스타가 되지만, '성처녀의 죽음 혹은 영면'에서 마리아의 그림을 그릴 때 '신성'을 배제하고 '인성'을 강조하고, 물에 빠져 자살한 매춘부의 시신을 보고 마리아를 그려 로마의 종교 지도자를 격노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감옥에 들어가고 타인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살인까지 저지르는 등 기이한 행동들을 했다. 하지만, 가끔은 오히려 그러한 기행이 그의 신화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한 조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품들을 시대별로 나열하면서 그 배경과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저자가 마지막으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다. 여기서 잘린 골리앗의 머리가 카라바조 자신의 머리이기 때문에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그림이다. 카라바조를 읽어 나가는 동안 그가 남긴 이야기와 그림을 보다보면 마치 알았던 사람처럼 그가 생생하게 살아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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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
카터 핍스 지음, 이진영 옮김 / 김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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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화'를 '진보'라고 착각하게 된 것, 생존은 진보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 과정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을까.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랜 시간을 거쳐 인간처럼 완벽히 살아남은 개체가 없으니 인간은 위대하게 진보했다는 결론을 역으로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이 급변해서 지구의 공기 구성 비율이 단 몇프로만 달라진다거나, 기온이 급강하하거나 운석충돌로 인해 분진이 하늘을 덮었다 해도 인간은 멸종했을 수 있다. 진화를 진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가 가진 특성이 환경에 우연히 잘 들어맞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지 완벽한 적응력을 가져서는 아닌것이다. 물론 다른 종에 비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이 진보한 것은 확실하지만 이또한 지금의 상황에서 하는 말이니 절대 자만할 일은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지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다시 진화가 진행된다면 그 끝에 인류가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는 인류의 발생이 필연이 아닌 우연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이에 비하면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듯하다. 인류는 진화의 결과이면서 필연적인 발생 개체라는 것이다. 진화의 결과에 다소 감상적인 결말이 와서 붙는 것은 얼핏 듣기엔 창조와 진화의 대립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처럼 보인다. 한 때 '지적설계론'이 등장한 이유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그 실체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근거라고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돌이킬수 없을 만큼 복잡하므로 그건 엄청난 지적존재가 설계한 것이다'라는 것도 있었다. 그 대부분은 진화가 그 증거를 갖듯 창조론 또한 증거를 찾자면 무한히 많다는 점에서 출발했지만, 사실 그 증거는 이렇게 복잡한 게 어떻게 혼자 될 수 있느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와 창조 사이에는 건널래야 건널수 없는 무한한 거리가 생길수 밖에 없다. '인라이튼 텍스트'의 전 편집장이자 이 책의 저자인 카터 핍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진화 과학자, 생물학자, 우주학자, 영성 철학자(?), 초인간주의자까지 만나서 인터뷰를 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면서 글을 썼다는 것인데, 몽테뉴는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지 않은가. 


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새롭게 시작해보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이 책의 곳곳에 과학적 결론처럼 쓰여있다. 엄밀히 하자면 과학과 종교의 영토싸움은 제로섬 싸움이라고 봐야한다. 어느 한쪽이 영역을 넓혀 간다는 것은 한쪽의 땅이 확실하게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과학이 발을 넓히면 넓힐수록 종교가 미지수로 남겨두려는 영역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를 막기 위해 반대의 방법으로 맞대결을 시도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지자 이제는 타협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진화론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며 단계를 차츰차츰 올리는 것인데, 그 부분이 바로 진화에서 발생하는 '이기적'인 행동들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비록 생존에 성공하더라도 동족의 실패나 좌절을 밟고 올라섰다는 불편한 승리감에 솔깃한 논리를 들이댄다. 이를 통해 '통합'의 시작을 모색하고 사실은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이지도 않았으며 오래전의 유전자에서 우리가 협력적 개체임을 발견했다라며 영적인 안정을 도모한다. 결국 진화의 사이클은 경쟁과 협력의 구도가 되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물질과 영의 조화로 발전해버린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고 있어 흥미로운 면이 분명히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위험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얽혀버리는 지점이 책을 보다보면 모호해지면서 어디서 어디까지 경계인지 애매해진다. 바로 그 점을 저자는 말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결코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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