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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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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열쇠가 자물쇠보다 먼저 도착하기도 한다.'(p.15)

그녀 앞으로 살구 45킬로그램이 배달되어 온다. 그녀는 그것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종이를 펼치고 그 위에 살구를 가지런히 늘어 놓는다. 한 나무에서 난 것이지만 어떤 것은 너무 많이 익어서 썩으려는 참이고, 어떤 것은 푸른기가 가시지 않은채 막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해야할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그녀가 간직해온 비밀같은 수수께끼들이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도, 이제 막 시작하려는 풋풋한 이야기도 모두 한 나무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 살구는 그녀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30년을 살던 집에서 따온 살구이다. 이제 그녀는 살구알을 하나 하나 정성스레 골라내며 잘못 풀려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다시 되돌리는 중이다. 


한 권의 책으로 엮였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썼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한 가지에서 났어도 모양이 다른 살구처럼 각각의 색깔을 가진다. 그것은 이야기야말로 하나의 인위적인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럼 없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야기의 초반부에 그녀는 동화 이야기를 꺼낸다. 동화라. 동심 이야기겠지? 라고 생각하다 보면 그녀의 생각은 그렇다. 동화의 주인공. 아무런 힘도 없는 주인공, '다른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힘을 행사할지언정, 정작 자신은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주인공이다. 그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를 돕는 인물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녀에게 어머니는 힘없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아닌, 그녀를 비극의 중심에 세우는 마녀의 역할이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어머니를 이야기 할 때 그러한 과거를 빠뜨린다면 그녀는 영영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지극히 감정적이었으면서도 '공정함'을 맹신하고, 딸의 성장에 대해서도 질투하며, 머리칼마저도 금발인 것을 허락치 않았던 어머니였다. 그녀는 정작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 비로소 어머니를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와의 간극에서 저자는 성장하면서 외로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이제 둘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고 오직 목소리와 얼굴만 남아서 간호하는 이와 간호받는 이의 사이가 되자 오히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녀는 20대 시절 항상 자신을 억누르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거역하고, 그랜드캐니언을 따라 래프팅을 해보겠냐는 제안에 '네'라고 답해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그것은 실현되었건 아니건 어머니의 목소리를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발을 내밀던 그녀의 첫 순간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보물을 거절한 듯한 느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지닌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p.59)

시간이 지나 이제 살구는 작은 유리병 안에 절여져 있다.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유리병 안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녀는 살구가 담긴 두 개의 유리병을 보면서 그것은 마치 받아 적은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면, 그리하여 그 글들이 유리병 속에 언제고 시간을 지키며 담겨 있다면 이제 그것은 더이상 나를 괴롭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저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때로 다르게 보여질 수 있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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