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박물관
아라리오뮤지엄 엮음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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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은 인생의 시계를 멈춰버리게 한다. 시간은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 뒤로도 옆으로도 빗겨가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과의 만남이 끝나버리는 순간 기찻길이 끝나듯 더이상 길은 사라진다. 


reset

단지 한 존재가 사라진 것 뿐인데 내 인생의 카운트는 0000. 구식 녹음기의 계기판처럼 reset. 내게 방법은 끊겨버린 선로 위에서 망연자실 서있거나 다른 선로에서 새롭게 시작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다. 대학때 내가 좋아했던 그 누나는 알바를 하던 호프집 사장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와 싸우고 이별을 직감하던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방엔 그 사람이 놓고간 가게에서 쓰던 의자가 하나 있었어. 둘 데도 없고 뭔가 썰렁한 내 자취방에 어울리겠다 싶어서 그 사람이 그냥 갖다 놓은거야. 처음에는 거추장스럽기도 했고 좁은 방에 어색하다고도 생각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의자가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시작했어. 어떤 날 크게 싸우고 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아. 아직 의자가 있지. 이것만은 가져가지 않았지. 그럴 때 나는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울고 또 울어. 그리고 마지막엔 적어도 한 번은, 그가 의자를 가지러 올거라고 생각하곤 했어. 나에게는 그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몰라. 
결국 그는 떠났다. 의자를 가지러 한 번은 올 것이라던 누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의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 그녀에게 희망의 끈이었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아마 '끝'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앞에 존재하는 그 사물을 보면서 그 사람의 존재를 믿고, 이별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 만약 그녀가 '실연의 박물관'을 알았다면, 이제는 그 의자를 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생각해냈는지 '실연의 박물관'은 꽤 근사한 발상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라는 박물관이 실제 있으며,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수집한 실연과 관련된 사물 82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 물품들은 지난 2월부터 3월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전시를 마치고 자그레브에 있는 박물관에 영구 소장된다고 한다. 물품 중에는 남녀간의 이별을 상징하는 물건이 많지만, 그 외에도 부모님과 이별, 남편과의 사별, 애완견과의 이별까지 모든 이별의 흔적을 다루고 있다. 

이별의 상징만을 모아 놓은 책. 을 상상해 본적이 있을까. 하나의 큰 이야기가 하나의 이별 봉우리를 향해 진행되는 게 보통의 책이라면, 이 책은 작은 봉우리가 82개 있는 산이다. 능선을 넘어서 정상인가 싶으면 다시 내려가고, 이전의 봉우리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또다른 언덕을 만들고 있는. 특별한 묘사도 세련된 기교도 없는 일반인들의 글이지만 꾸미지 않아서 더 와닿고 애잔하게 감성을 건드린다.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무덤 앞에서도 숙연해지는 것은 그를 다시 볼 수 없어서 슬퍼할 누군가의 아픔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기증된 이 물건들이 상징하는 것은 '無'이다. 존재함으로써 무를 증명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실연의 박물관이 갖는 또다른 의미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마땅할텐데, '없음'을 '있음'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무척 쓸쓸하게 만든다.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의 부재가 메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물의 존재는 사람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다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실연의 박물관'을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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