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아,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처음부터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란다. 그래? 그럼 어디 들어보자. 네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는지. 단단히 벼르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말은 정말 괜한 뻥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챕터마다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라는 말이 어찌나 아쉬웠는지 밤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남자의 인생 역정이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한 시대와 역사에 맞물린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만 볼 게 아니었다.    
프라하라는 멋지고 불안한 도시에서 호텔 견습 웨이터로 시작한 디테, 꼬마라는 뜻의 이름처럼 키가 너무나 작아 늘 목을 있는 대로 빼고 다녀야 했던, 시작부터 피곤한, 태어날 때부터 둑을 때까지 견습 웨이터일 것만 같은 그런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라는 모토를 시작으로 디테는 다 보고 다 듣는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재빠르게 깨닫고 지름길로 들어선다. 제일 먼저 깨달은 건 ‘머니’의 힘이었다.    

‘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몇 푼 안 되는 동전 몇 개를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또한 세상에는 꼭 불행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불행과 함께 따라오는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사람들이 얼마나 머니에 약한지, 부자들이 말로만 존경하는 노동이 외양 뿐이라는 것도 깨닫고 디테는 나름의 가치를 깨달으며 역사의 소용돌이, 시대의 회오리 속에 온몸을 담근다. 웨이터로 일하는 동안 만나고 보고 듣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삶, 철학을 자신의 삶에 응용하는 능력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시게 되고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감당하게 된다. 성으로 시작했던 육체의 쾌락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사랑이 사람들을 바꾼다는 걸 알게 된다.       

‘코시체크 주위에는 날씨가 어떠하든 산책을 하는 연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언제나 군복을 입은 젊은 장교와 젊은 여자가 말없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던 나지만 왜 그렇게들 애틋한지, 그런 것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맞힐 수가 없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우 보였던 것이다. 이게 바로 새로운 인간이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소리를 지르며 윽박지르는 거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겸손하고 사려 깊으며, 겁먹은 동물처럼 예쁜 눈을 가진 인간이었다.’

결국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호텔 사장의 자리에까지 이르지만 그가 결국 그를 맡기게 되는 건 동물과 자연이었다. 결국 그가 깨닫게 되는 건, 그에게 제일 중요한 건, 그의 길이며 그의 불행과 행복이라는 것이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록 내 인생이라는 길의 처음과 끝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을지라도 곡괭이와 삽 대신 기억의 도움을 빌려 아주 먼 과거까지 돌아갈 수 있게 정비해놓고, 기억하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 회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유머스러운 표현들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고 실컷 얘기를 늘어놓고는 은근슬쩍 발을 빼는 방식도 꽤 신선했다. ‘이야기가 흡족하셨는지요? 이제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땐 아쉽기까지 했다. 암튼 매력 넘치는 작품을 발견했다. 그럼 제목이 <왜 영국왕을 모셨지>일까. 분명 주인공은 아비시니아왕을 모셨다고 했는데. 오호~ 요건 비밀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