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의 신발
뱅쌍 들르크루아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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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고독하게 살아간다.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이 사람은 더 똑똑해 보이고, 또 이 사람은 더 예쁘고 저 사람은 더 부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속에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모두 외로움과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모두 똑같이. 알랭 드 보통을 처음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세상사, 인간사를 철학을 통해 내게 이렇게 잘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번엔 뱅쌍 들르크루아라는 철학자이자 작가가 이 소설로 비슷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리의 고독을 더 잘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따스함을 더 잘 알게 해준 고맙고 쓸쓸하고 따스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빠져들 정도로 재밌고 흥미로웠다. 사실 작가가 휘두르는 문학적 펜으로 조금 휘둘리기도 했다. 왜 이렇게 지붕 위에 버려지는 신발이 많은 거야?,라는 정말 어이없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멍청한지. 각각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나레이터가 다른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이 인물과 저 인물이 서로 엇갈리는 그런 구성이었는데, 모종의 반전처럼 중반까지도 몰랐던 것이다. 
 
한 지붕 위에 버려진 신발 한 짝을 두고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엮어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또는 동물을 암시하기도 하고 복도에서 마주치기도 하면서 이야기는 연결된다. 이는 모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의 인생 일상 고독 허세 사랑 우정 들의 테마가 펼쳐진다. 복사기를 파는 남자는 딸이 한밤중에 깨어나 우는 바람에 다음 날 피곤을 걱정하며 아이를 재우려고 노력하지만 아이는 맞은 편 지붕에서 날개 없는 슬픈 천사를 봤다고 한다. 한 남자는 자신의 옛 애인 집에 찾아가 그녀의 새 애인 신발을 던져버리는 복수를 하고 추방된 불법체류자 애인을 눈물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성도 있고 유명한 문학 방송의 앵커였던 나는 어느 날 깨달음의 소리를 듣고 칩거해 그 깨달음의 근거를 찾는다. 비극적 요소에서는 배신한 친구들 때문에 지붕 위에서 둑어가는 한 남자와 그 남자와의 새로운 우정을 열어가는 젊은이가 있고 자신 곁에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기보다 첫눈에 반한 여자의 황금샌들 한 짝을 들고 그녀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의 동화 증후군이 있고 자신의 고독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는 남자를 바라보는 개도 있고 응급구조(어떤!)를 요청하느라 가짜로 심장마비까지 갖다대는 못 말리는 여든 할머니가 구조하는 멋진(그보다 더 슬프고 외로운) 소방대원 오빠도 있고 있는 그대로의 예술을 보여주는 미학적 요소의 화가도 있다.

<난 언제나, 마치 나의 운명인 듯, 이 세상의 비참함과 만났다. 내 마음과 관계없이 늘 세상의 비참함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결국 그것을 내 어깨에 짊어져야 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언제나 내가 슬프다고 했다. (...) 저녁에 욕실에서 양치질을 하며 거울을 바라볼 때조차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바로 하루 중 마지막으로 만나는 불행한 얼굴이었었으니까 말이다. 제일 끔찍한 얼굴은 아니지만 분명 가장 지치게 만드는, 가장 음침한 절망을 불어넣는 얼굴이었다.> -<복수심>

그렇게 다양한 세상살이에 대한 의견과 논쟁 그리고 작가의 시선이 결국은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의 주제로 귀결된다. 피곤하고 힘든 현실, 그럭저럭 끌려가기만 하는 인생인데 어느 날 아이가 본 천사의 모습이 그 무기력에서 나를 깨운다. 물론 그 천사도 아이나 내가 생각한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마지막 챕터의 그 자살하려던 사람은 세상을 일깨우기 위해 자살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그만두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결말을 가져온다. (마지막 작가의 질문이 어이가 없다!)     

마지막 장의 그 사람이 왜 자살하려고 했는가.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이 이야기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 드러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 아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독하고 외롭다. 같은 건물 안에서 함께 살면서도 결국은 다 따로 혼자 외로워하면서 산다. 그게 이 세대의 얼굴이다. 그는 그걸 끝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여기 고집 세고 황당한, 인생을 다 살고 이젠 여분의 인생을 살고 있는 할머니가 있고 잘 생기고 착한 젊은 오빠,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가 있다. 할머니는 둑을 날만 기다리는 그 여분의 삶에서 의외의 즐거움과 행복을 발견한다. 그리고 젊은 오빠는 남들이 생각하는 인기 많은 멋진 삶을 살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호모이고 남자친구도 없고 어느 날 밤 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 둘이 데이트를 한다. 결국 이 세상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전혀 반대일 것 같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나눈다. 구급대원이 오히려 할머니에게 구원을 받는 그런 결말... 어쩌면 그건 작가가 의미하려고 하는 바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이 세상을 향해 조금만 마음을 열어보면 나와 똑같이 고독한 누군가가 보일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소방대원이 데이트를 하듯이. 그러려면 우리 모두 자신의 고독을 바라보고 그 고독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좋아한 대목은 바로 <응급구조>였다. 쓸쓸한 가운데 퍼지는 그 따스함은 정말 감동이었다. 앞으로 외로워지면, 더 고독해지면 난 이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뱅쌍한테서 전화가 왔단다. 밑도 끝도 없이 묻더구나. 너무도 간단하게 말이야. 오늘 비번이에요. 같이 산책하실래요? 자끄마르 앙드레 미술관에 가요. 그림도 보고 점심도 먹어요. 나갈 채비를 할 시간도 빠듯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매일같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정작 자기를 구해줄 사람은 없다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니.>
<왜 왔는지, 왜 우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난 알 수 있단다. 그런 고독을 나도 겪어봤으니까.>
<재미있지? 왠지, 마음이 슬프면서도 행복하더구나. (...) 그래, 계속 여기 있다. 나도 이젠 혼자 아침을 먹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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