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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지음, 김석희 옮김 / 쿠오레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직역하면 ‘악마인 그녀의 삶과 사랑’일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두 가지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나는 케이블에서 본 ‘스완’이라는 프로였고 또 하나는 예전에 읽었던 ‘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라던 독일 작품이었다. 성형으로 개선된(!) 외모로 다시 태어나는 의미에서 ‘스완’이라는 프로가 떠오른 것이었고, 자신을 떠난 남자에게 복수하는 의미에서 후자의 작품이 떠오른 것이었다.
영화화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꽤 재밌었겠다, 통쾌했겠다 하는 생각과 함께 문학작품으로선 너무 통속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사회의 약자이고 추한 외모로서도 약자인 한 여성이 신(!)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남자로부터 부여받은 여성으로서의 운명에 대항해 일어서는 재기에 관한 이야기로서 페미닌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 통속과 페미닌문학 사이에 생기는 많은 의문점들은 어찌 할까.
표지에 그려진 대로 주인공 여자의 외모는 정말 추하다. 추한 외모로도 185센티미터가 넘는 등치로도 저절로 남자의 애정이 생겨날 처지는 아니다. 재수(!)가 좋아서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해서 두 아이들을 낳아 현모양처로서 살고 있지만 남편은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작가와 바람을 피운다. 그걸 또한 정직이라는 이름 아래 시시콜콜히 아내에게 말하는 남편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못생긴 여자들을 ‘개’라고 부른다. 하지만 개도 살고 있는데……. 그래 나도 살고 있다. 현실이라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드러내고, 끊임없는 굴욕감 앞에 피부를 악어가죽처럼 두껍고 둔하게 만든 채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평등해지는 노년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좋은 노파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감정은 못생긴 여자가 아니더라도 사회나 가정에서 약자인 여자가 느끼기에 충분한 감정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여성’을 대변하는 페미닌문학을 지향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은 노파가 되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어느 날, 자신을 ‘악녀’라고 정의를 내린 남편의 말에 희열까지 느낀다.
‘하지만 멋지다. 가슴이 뛴다. 악녀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금세 머리가 개운해진다. 기분이 상쾌하다. 부끄러움도 모른다. 죄책감도 필요없다.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내가 원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원하는 것을 빼앗을 수 있다. 악녀니까!’
악녀가 된 그녀는 복수, 힘, 돈,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대가로 돌려주지는 않을 사랑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 일에 착수한다. 자신이 맡았던 현모양처의 역할을 남편의 애인에게 떠맡기고 남편을 파멸의 길로 내몬다. 읽다보면 처음에는 그녀의 수많은 노력과 복수에 어느 정도 공감했던 안쓰럽던 감정에서 점점 더 오바한다는 불편한 감정으로 흘러간다. 성형외과 의사들에게 내보이는 사진 한 장.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도대체 페미닌문학을 대표하던 ‘여성’은 어디로 가고 그런 유치한(!) 여성만이 남았는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복수이고 진정한 여성의 모습인가. 그 결말엔 어쩔 수 없는 통속이 못생긴 모습으로 우릴 바라보는 것 같다.
‘스완’이라는 프로를 보다 보면 한편 ‘예쁜이’, ‘날씬이’만 원하는 이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 한편 조금이라도 개선되고자 애쓰는 그녀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예쁜 것들이 더 예뻐지려고 자꾸 손을 대 오히려 더 이상해지는 많은 여자들에 비하면 추한 것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에게 안쓰러움이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구심도 쏙 들어가 버린다. 그런 게 자본주의의 한 모습일지라도 예뻐지고 자신감을 찾은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해피해진다. 더불어 통속과 페미닌 사이에 있는 이 작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