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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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이 시집은 내 침대 맡을 거의 한 달을 지켰다.
어쩌다 보니 매일 잠들기 전에 한, 두 편씩 읽게 되었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시들을
사실 하룻밤에 한, 두 편 이상씩 읽기는 버거웠으리라.
그래서 한 편 읽고 생각하다 넘기기 어려워,
다른 책을 읽다가 잠들곤 했었다.

그러다 어제는 드디어 시집 3부 가운데 1부를 마치고
2부를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너무나 맛있는 시들을 단숨에 먹어버렸다.

그 여세를 몰아 3부도 너무나 즐겁게 다 읽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게 되었다.

안도현 시인이 그렇게 유명한데도 난 부끄럽게도 <연어>를 읽은 게 다다.
게다가 그 작품, 참 미안한 말이지만 난 큰 감흥이 없었다.
내가 너무 속세에 물이 든 탓일 게다.

난 시를 좀처럼 잘 안 읽는다. 요즘은 즐겨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릴 적엔 김소월부터 김영랑, 윤치환, 윤동주, 황동규 등등
너무나 많은 시들을 외우고 다녔었다.
학교에서 배워서가 아니라 정말 좋아서,
정말 너무나 좋아서 늘 시집을 끼고 다녔었다.

그러다 어느 새 난 시를 멀리 하고 소설만 읽는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를 읽는다. 그 소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감성이 무뎌진 내 탓일 수도 있고
복잡다단한 물질만능 세상 탓일 수도 있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시를 쓰는 시인들의 탓일 수도 있고
쉽고 편안한 시보다 알아먹기 힘든 시들을 전면에 배치한 출판사 편집 탓일 수도 있다.

이 시집, 맛있는 시들로 가득한 2부 너무 좋다.
3부도 내가 생각하던 안도현 시인 이미지가 물씬 풍겨 너무 좋다.

만약 나 같은 독자가 있다면, 2부를 제일 먼저, 그다음에 3부를
그리고 제일 나중에 1부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이 이 맛난 시들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
- 조문 가운데에서

비 온다
찬 없다

온다간다 말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반죽 치대는
조강지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
- 수제비 가운데에서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 갱죽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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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8-02-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맛나게 읽으셨다니, 진달래님과 비슷한 시기에 읽은 거 같은데 전 별로 감흥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시 읽는 게 점점 두려워져요. ;;

진달래 2008-02-27 09:20   좋아요 0 | URL
아, 저요... 1부 읽다가 정말 힘들었어요.
어찌나 진도가 안 나가던지요...
간신히 1부 끝나고 2부를 읽는데 넘 맛난 거예요. 시들이...

전 좀 쉽고 편안한 시가 앞에 있었으면 좋겠더라구요.
근데 시인들의 요구인지 출판사 편집인지,
꼭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앞에 있어서
진을 빼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읽기 싫어지거든요.

전 진짜 감상 정도도 아니고 그냥 읽는 거예요.
시 읽는 게 두려워진다는 말씀, 알듯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