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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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한번 읽었을 때 소름이 끼쳤다. 뭐, 이런 작품이 다 있어… 찜찜하잖아. 좀 너무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 갔었다. 그래서 다 읽고 던져놓았었다. 내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한 작품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며칠 후에 다시 훑어보았다. 아, 그런데 이건 뭐지? 이 깊고 깊게 느껴지는 작가의 시선, 그녀의 거친 손길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까지 함께 내게 깊은 흔적을 남기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 작품집엔 수많은 삶에 대한 조롱과 진심이 함께하고 그 삶들은 왜곡과 과장을 통해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귀신과 삶과 욕망과 비뚤어진 성과 불완전한 완벽함과 이 사회의 부조리가 모두 함께 들어있다. 그래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던 첫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제목은 왠지 은밀할 것 같지만!) 빼고는 모두 읽는 내내 불편했던 것이다. 하긴 이 마음 따스해지는, 순수한 이야기보다는 끔찍한 다른 이야기들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내의 열정과 욕망에 넌덜머리가 났다. 끊임없이 꿈꾸고 욕망하고 추구하는 아내. 관광가이드에서 통역사로 여행사 경영자로 변모했고, 또 여전히 무언가를 새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아내.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그 지긋지긋한 욕망덩어리.’  

이런 아내의 욕망에 비해 할머니의 발 사진을 찍어온 소년 J의 시선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싸하게 만든다.

‘다 닳아버린 발톱에 심하게 흰 발가락. 허옇게 살비듬이 일어난 발등과 시커멓게 죽은 복사뼈. 늙고 병든 발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삶의 지난한 과거와, 곧 걸음을 멈추게 될 조만간의 미래를 말해주는 두 발. 그는 녀석이 들고 온 한 장의 사진 속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진 속의 두 발은 단순히 늙고 병든 발이 아니다. 어느 추운 날 뜨끈한 국밥 한술 뜨는 순간처럼, 가슴 한쪽이 싸해지면서 동시에 훈훈해지는 뭉클함이 들어 있다. 그것은 노인의 발 어딘가 숨겨져 있는 녀석의 시선, 안쓰러움과 뿌듯함과 깊은 애정이 담긴 그윽한 시선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미 사라져버린 육체에 대한 다정함과 동정심. 그는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삶은 고단하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기에 힘들기만 하다. 어렵던 시절, 구할 수 없었던 그 애를 어깨에 얹어놓고 사는 그녀는 울 수 없다. 아니 울어도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 그런 삶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 애는 힘겨운 모두의 삶에 고단함을 더한다. 그녀에게 그 고단함은 삶의 힘이지만.   

‘눈물은 감정의 늪이다. 유약한 인간들만이 제가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법이다. 눈물은 굴복의 다른 이름이다. 아픔과 고통에 대한, 조롱과 비난에 대한, 슬픔과 고독에 대한 굴복의 징표다. 나는 눈물 대신 오줌을 싼다.’

나머지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이단뛰기에 성공하고 솔개뛰기까지 도전하는 우리의 위대한 알리, 땀 냄새로만 사랑에 빠지는 동시통역사 고모 얘기는 그래도 나았다. 진실을 밝히겠다며 늪에 도착한 남자, 봄이면 갇혀 지내야 하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장롱에서 나오지 않는 여자 아이, 완벽한 독신의 삶을 위해 이름마저 우아한 애완견 비숑을 기르다 완벽한 배신을 당하는 불완전한 독신 이야기 등등 모두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다.(백가흠 냄새 나!) 물론 그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의 실마리는 아마도 <내가 쓴 것>에 있지 않을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외면한 세상, 내가 저지른 실수, 알게 모르게 저지른 세상에 대한 교만과 악행들, 그것에 대한 고백성사이며, 자기 반성이며, 죄사함이다. 세상에 진 빚이 없으니 자유로운 소설이 나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만이고 자기합리화다. 어찌 이 세계에 무결할 수가 있겠는가.’

현실과 소설의 삼투압 작용이다. 더 이상 이 세상은 숱한 현실이 존재하는 곳만이 아니다. 허구와 과장 모두 들어있는 소설 속 세상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세상, 이제 그 어느 것도 하나의 사실이고 하나의 상상이 아니라, 자연스레 왕래하는 세상, 어쩌면 그런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깊고 깊은 작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그런가.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고 장롱을 열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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