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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달려라 아비>로 단번에 나를 사로잡은 김애란의 새로 나온 단편 소설집이다. 첫 작품집에서는 도시의 일상을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냉정하고 무덤덤하고 세심한 시선으로 그려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나이답게 시니컬하기도 했고 건방지기까지 한 당당함이 맘에 특히 들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집에서 그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사방으로 뻗은 짧은 머리에 옆으로 째려보듯 치껴뜬 눈 대신 곱게 내리깐 시선이 그 동안의 변화를 나타내는 걸까. 도도함 대신 그녀는 이제 이 작품집으로 돌덩이 같은 막막함을 내 가슴에 얹어놓았다.
이 작품집엔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성탄특선>, <자오선을 지나갈 때>, <칼자국>, <기도>, <네모난 자리들>, <플라이데이터리코더>라는 여덟 개의 단편이 들어있다.
첫 번째 작품집과 비슷한 점은 아버지의 자리, 남자의 자리가 부재한다는 것과 여전히 엄마, 언니 그리고 후배 같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아버지나 남자가 있긴 하지만 보증을 서서 집을 망해놓거나 감옥에 갔다 왔다거나 성탄절 날 쓰레빠짝 질질 끌며 비빔면을 사러 먼 길 다녀오는 등 아주 짧거나 그 존재 자체가 그냥 이름 뿐이라는 느낌이었다. 남자들만 등장하는 <플라이데이터리코더>라는 작품에서조차 주인공은 엄마가 되는 블랙박스이니 말이다.
그에 비해 아버지나 남자가 부재하는, 즉 힘 있고 재정적으로 먹고살게 해주고 가정을 책임지거나 안정되게 해주는 존재가 부재하는 대신, 엄마를 비롯한 집안 여자들의 자리는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피곤에 찌든 모습들이었다.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의 화목한 가정이나 서로 지지고 볶는, 어찌 보면 평범한 삶이 아니라, 어떻게든 생활을 이끌어가려고 기를 쓰는 올망졸망한 여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그 막막함의 모습들은 평생 칼을 쓰다 그 칼을 쓰던 부엌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어머니나 취업 시험 준비를 하느라 좁고 어둑한 독서실, 고시원 또는 지하단칸방 등을 헤매는 언니나 나, 또는 학원에서 피곤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침마다 ‘조금만 더’를 고민하는 선생의 고단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겐 어떤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거나 어떤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는 어떤 모습도 보기 어렵다. 이들은 다만 막막한 현실을 고단하게 살뿐인 것이다.
김애란은 여전히 세심한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또 인물들의 심리를 담담하고도 자연스런 필치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작품집과 비교해서 그리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난 앞으로도 김애란의 다른 작품을 기다릴 것이지만, 서른다섯이라서 스물다섯보다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꼭 나이가 많아서 좋은 작품을 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나이가 되어 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보는 스물다섯의 세상은 너무나 좁고 편협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소설들이 모두 그런 한 가지 좁은 세상을 그리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