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출판된지 십년도 더 된 아주 작은 책이다. 내용도 한 가지 흐름으로 줄줄 흐르고 있어 읽기도 쉽고 금방 읽는다. 하지만 내용에 쉽게 공감이 가진 않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거나 흥미가 일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나를 파괴할 권리란 결국 자살을 말하는 것일 게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뜻을 강하게 풍기지 않는가. 처음에는 사람 목숨이 부모에게 귀속되어있다거나 신이 주신 거라든가 하는 의미에서 그걸 거부하고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묘하게 추리처럼 ‘의뢰인’이니 ‘고객’이니 어쩌구 하는 나레이터의 말로 시작된다. 아, 그렇다면 살인청부업자인가보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제목하고도 맞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흔히 영화에서처럼 타인을 살해하고 엄청난 보수를 받고 호화롭게(!) 숨어서(!) 사는 살인청부업자도 아니고 자신을 파괴할 권리에 대한 인식 그리고 행위로의 도움을 받는 의미에서 의뢰인과 그 보수, 더구나 그 보수가 간혹은 해외여행을 다니고 반년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니… 거참 좋은 직업일세.

‘고객과의 일이 무사히 끝나면 나는 여행을 떠나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고객과 있었던 일을 소재로 글을 쓴다. 그럼으로써 나는 완전한 신의 모습을 갖추어간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말은 그럴싸하다. 결국 ‘나’라는 인물은 창작이라는 결론으로써 신이 된다는 소리이다. 창작만으로? 그럼 살인으로? 자살로 이끈 것도 살인인가? 아니면 둘 다? 결국 저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쓰였단 말인가? 아니다. OR의 의미이니까.

보수 이야기가 없었다면 좀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헛세상을 헛되게 사는 많은 무의미한 삶과 인생 들을 그냥 보기가 안타까워 그걸 돕기 위해 나섰다면 오히려 부조리극을 한편 본 듯 했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나 심리는 늘 평범을 넘어설 때 그 가치가 더 인정받는 듯 보이니까. 정말 사악한 인간이거나 오히려 반대로 어떤 특이한 신념을 갖고, 자신을 파괴할 생각도 감각도 없이 사는 이들에게 그 느낌을 일깨워주고 인식시켜주고 행위로까지 이끈다면 그는 스스로를 어떤 결정자나 조력자, 또는 신이라고도 자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논리가 2% 아니 20% 부족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탄탄하지 않은 구조로 집을 짓기 시작했으니 집 자체는 화려하고 멋질지 모르지만 다 짓고 나서 금방 허물어지는 듯한 소설 구조,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기는 저런 생각을 하는 일개 독자인 내가 얼마나 소설적 부조리에 물들어있는지 알겠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나레이터와 등장하는 의뢰인들의 이야기는 그 소설적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느낄 정도로 스토리 자체는 재밌고 흥미로웠다. <마라의 죽음> <유디트> <사르다나팔의 죽음> 등의 그림에 얽힌 둑음 이야기도 유쾌한 일깨움이었다. 또한 세연 홍콩에서 온 여자 미미 그리고 세끗 인생 K 형인 C의 연관관계나 다른 인생 들 모두 독특한 접근방식이었다.

난 김영하를, 김영하의 작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끔 그에게, 그의 작품에게 필요이상으로 잔인하게 구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가끔은 미안해진다. 그렇다고 나를 찾아오지는 마시라.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난 그런 말을 듣고 김영하의 나레이터에게 ‘의뢰’를 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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