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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어릴 적에 어른들이 바둑 두는 걸 보면서 그 느리면서 지루하고 복잡해 보이는 게임이 그렇게 이상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장기는 빠르고 단순한 게임이어서 바둑보다는 장기를 배우고 그 긴박한 게임을 잠시 즐겼었다. 그러다 화토를 배우고 나서는 다른 게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씨가 씨인지라 우리 식구 모두, 엄마만 빼고는 모두 화토를 좋아했고, 또 고수들이었다. 나랑 동생 용돈을 따먹으려고 오빠는 우리에게 고도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몇 판 만에 자신의 용돈을 잃게 생기자, 우리에게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한 마디를 남기고 판을 접었다.
그런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바둑 두는 한 중국 소녀가 여기 있다. 바둑에 얽힌 사랑과 의리가 때로는 감각적이고 때로는 맑고 순수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둑알 아래 슬며시 드러나는 그 모습은 또한 어느 격렬한 사랑 못지않게 열정적이고 아름답다.
‘한 수 한 수는 영혼의 밑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발걸음이다. 나는 그 미로들 때문에 바둑을 사랑했다. 돌 하나의 위치는 다른 돌들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한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돌들 사이의 관계는 속속 변모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법이 거의 없다. 바둑은 계산을 비웃고, 상상력을 조롱한다. 구름들의 연금술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모양 하나 하나가 모두 최초의 의도에 대한 배신인 셈이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매순간 가장 유연하고, 가장 자유로운 동시에 가장 냉철하고, 가장 정확한 수를 재빨리 찾아내야만 한다. 바둑은 기만의 게임이다. 오직 하나의 진실, 바로 죽음을 위해 온갖 허상으로 적을 포위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생활을 하는 서로 다른 두 국적의 남녀의 사랑 아닌 사랑 얘기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 두 편이 각각 다른 곳에서 평행선을 달린다. 한편에선 여자로 피어나기 직전의 한 중국 소녀가 광장에서 바둑을 두고 또 한편에서는 전쟁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일본 장교가 있다. 소녀는 소녀대로 꽃봉오리 같은 삶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며 육체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고, 남자는 남자대로 자신의 삶보다는 나라를 위한 둑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나는 내 운명을 잘 다스려 행복해질 것이다. 행복은 에워싸는 전투인 바둑과 같다. 나는 고통을 질식시켜 없앨 것이다.’ 막 사랑을 시작한 소녀의 다짐이다. 하지만 바둑에도 배신이 있을까. 또한 남자의 인생은 ‘내일, 우리는 먼지가 되어 대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 누가 한 군인의 애달픈 사랑을 기억해줄까?’라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 이 두 남녀가 바둑 두는 광장에서 만나고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랑의 시선이나 의견 교환 대신, 바둑알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남녀의 생활 변화, 심리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여자는 사랑이라고 믿던 남자의 배신을 겪고 남자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한순간의 욕정을 창녀들을 통해 푸는 삶 아닌 삶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중국 남자와 중국 여자는 입을 열기도 전에 서로를 이해한다. 동일한 문화를 품고 있는 그들은 두 개의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일본 남자와 중국 여자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겐 함께 나눌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씁쓸함이 남자의 생각이다.
두 남녀 사이에는 엄밀히 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둑알이 대신 그들 사이의 대화처럼 서로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남자도 여자도 서로의 생활이나 심리 변화에 따라 바둑의 수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짐작한다. 남자는 생각한다. ‘평상시처럼 그녀는 말이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여자들의 미스터리, 그 침묵이 내 목을 조여온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왜 아무 말도 않는 걸까? 여자들은 기억력이 둔하다고 하던데, 벌써 모든 걸 잊어버린 걸까? (...) 그녀의 돌들이 날아오른다. 그녀의 응수가 점점 더 빨라진다. 그녀가 갖은 술수를 부린다. 정말 놀라운 여자다!’ 여자는 생각한다. ‘나도 그들처럼 삶을 갈망한다. 나는 만주의 집으로, 쳰훵 광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거기 앉아 그 무명의 상대를 기다릴 것이다. 어느 날 오후, 그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불쑥 날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한 결말에서 나타나는 절박한 상황은 사랑보다 더한 의리라고 보여진다. 사랑보다 더 끈끈하게 바둑알로 연결되었던 두 사람, 그 의리는 바둑을 두면서 그들 마음에 자리 잡은, 둑음도 초월하는 의리가 아니었을까. 그들의 마지막은 정말 가슴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 되었다. 남자는 고백한다. ‘염려하지 말아요. (...)’ 여자도 고백한다. ‘제 이름은 밤의 노래「夜哥」예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 고백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