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끔찍하게’ 긴 세월 칠십 년, 그 세월에 비해 건질 장면이 많지 않아 보이는 허망함을 시냇물 소리, 꽃망울, 바람과 눈 그리고 햇살이 선생님을 벗 삼아 다독거려준 책이 바로 <호미>이다. 그리고 이제 독자를 다독거려준다. 자연과 가족, 70세의 일상, 둑음에 대한 바람 그리고 호미질 같은 정직한 삶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를 거저먹고 있을 때, 선생님은 77세라는 나이를 거저먹은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신체적인 나이로 보면 내 나이도 적은 게 아닌데, 기억을 되살려보면 도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지금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아프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나이를 어디로 먹었길래... 하는 것이다. 그렇게 헛먹은 내 나이를 돌아보게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나이만이 줄 수 있는 여유로움, 사고의 폭과 깊이 그리고 자연스러움... 그것들이 모두 글 속에, 행간에 녹아있다.  

어릴 적엔 자연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가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더 자연에 감사하게 된다. 꽃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것이라고 하는데,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과 세상에 지치다 보면 어느 날 꽃과 나무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들린다. 흙을 돋우고 꽃씨를 뿌리고 하루하루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 그 마음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기쁨 때문에 기다린다.’ 기다리고 마중하는 마음...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가족은 선생님의 추억과 일상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예전 글에서도 늘 그 애증이 잘 드러나지만 이제 선생님은 그 가족을 감사와 그리움으로 피워낸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전쟁 통에 가족을 등진 오빠... 자유를 주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엄마의 말뚝에 매려고 했던 어머니, 보수적이면서도 신식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구처럼 의지했던 큰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할 정도로 아름다운 감동이 살아있었다. 

어느 새, 세월은 흘러 ‘소심하고 변변치 못한’ 70세로 들어선 선생님은 자연 속에서 삶을 꾸리면서도 끊임없이 일상에 부딪치며 살아간다. 할머니 소리만 듣다가 어느 날 ‘아줌마’ 소리에 감동 받은 친구의 얘기, 다쳐서 일상이 고달팠던 지루한 날들, 그리운 침묵, 여행 중에 겪게 되는 상처받는 휴머니즘, 익숙해지지 않는 자본주의 공부, 지하철에서 만난 무례한 삼사십대... 등등 70세에 겪을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자잘한 씁쓸함으로 그려진다. ‘특히 오늘의 주역인 삼사십대의 본데없음과 상상력 결핍은 우리가 저들을 어떻게 길렀기에 저 모양이 되었나, 죄책감마저 들게 한다. 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 존중, 친절, 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칙이다. 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둑음을 생각하게 된다. 두려움에 떨 수도 있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도 있고 더 살고 싶다고 몸에 좋은 것만 찾아먹는 사람도 있고, 자식들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마지막 날까지 건강하게 움직이다가 잠자듯이 가고 싶다는 등의 나름대로 바람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주위에서 가족, 친구, 아는 사람, 하나, 둘 사라지는 걸 경험하게 된다. 선생님도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을 겪으며 선생님은 추억도 떠올리고 살아생전 고마움도 그리고 자신의 둑음에 대한 바람도 그린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글쟁이로만 살아오던 선생님은 더 늦기 전에 ‘죽기 전에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농사꾼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잔디나 꽃밭을 가꾸면서 호미를 많이 쓰는데 그 예찬이 예사롭지 않다. ‘호미는 남성용 농기구는 아니다. 주로 여자들이 김 맬 때 쓰는 도구이지만 만든 것은 대장장이니까 남자들의 작품일 터이나 고개를 살짝 비튼 것 같은 유려한 선과, 팔과 손아귀의 힘을 낭비 없이 날 끝으로 모으는 기능의 완벽한 조화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이다.’

선생님이 평생 써오신 글에서 나는 이러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유려한 필체, 과장하거나 오바하지 않는 글의 진정성 그리고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인 선생님만의 문학성이 바로 그것이다. 늙으신 선생님의 모습에서도 그런 아름다움을 느낀다.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인 아름다움... 그러면서도 고집스런...

선생님, 새봄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정원의 꽃을 가꾸시면서 이제 더 건강한 80세를 준비하는 선생님만의 일상을 보여주세요... 또 다른 80세의 <호미>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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