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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2006년 겨울호 - 통권 3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여름 창간호에 이어 가을호 그리고 이제 겨울호를 읽었다. 창간호부터 ‘심심해?’와 ‘도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맛깔스런 많은 글이 소개되었다. 나름 신선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이번 겨울호만큼은 아니었다. 일단 ‘훔치다’라는 야릇한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재밌고 즐겁게 표현을 하다니, 겨울이 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정말 신선하고 상쾌한 겨울호였다.
‘내가 쓴 글이 아무것도 아니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이혜경의 진솔한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음을 훔치고, 책을 훔치고, 자전거를 훔치고, 못 훔치는 것 없이 다 훔치는 괴도 뤼팽, 그리고 내 마음을 훔친 작가, 책 등등을 소개한 ‘훔치다’ 코너의 글은 정말 빨려들듯이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생각해 봤다. 내 마음을 훔친 작가와 책은 누구와 어떤 것이고, 내 인생에서 내가 훔쳤던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훔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남들과 다른 나만의 ‘훔치기’ 리스트도 작성하면서 너무 즐거웠다. ‘타인의 정체성’마저 훔침으로서 법이 단죄할 범법자가 아예 없는 셈이 되어 버리는 뤼팽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성귀수 선생님은 ‘훔치기’에 대해 결론짓는다. ‘사물을 넘어 존재를 훔치는 이 놀라운 경지... 자신을 벗어나 그 누구로도 되고 싶고, 또 될 수 있다고 믿는 욕망, 그것은 자아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가능케 하고, 그 나르시시즘적 상상력 앞에서 현실의 감시와 억압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르센 뤼팽이 훔치기의 달인일 수 있는 이유임과 동시에, 문학이 늘 우리의 마음을 성공적으로 훔치는 비결이기도 하다.’
원래 재밌는 카툰 코너는 황당하면서도 웃겨서 좋고, 단편을 소개하는 정이현의 ‘짧은 소설’도 한번 따라해 보고 싶게 만들었고, ‘묘안’이라는 릴레이 소설도 너무 짧은 게 단점이지만 슬슬 흥미로워지고, 재수록 소설 ‘큰 평지’는 어릴 적 감성이 그대로 살아나오는 것 같아 좋았다.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피플란도 점점 더 재미를 더해하고, 문화란의 영화나 광고, 소설 다시 쓰기도 무척 흥미로운 시각을 더해주고, 삶코너도 청소년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식 코너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진달래꽃’, 지식을 넓혀주는 ‘개념정원’ 그리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미술읽기의 ‘미술이 여자와 동물을 만날 때’도 신선했다. 특히 <허생전>을 다시 쓴 김상우의 ‘개가 인재가 된 사연’은 그 기발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호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청소년 문학상으로 실린 작품들이었다.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좋았지만 특히 <조각배>와 <거미줄>은 성인작가 작품 뺨치게 그 구성과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돋보여서 좋았다. 불구 엄마를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결국엔 자신의 그 부끄러움과 화해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설정은 좀 뻔하다. 하지만 그렇게 뻔한 설정을 부족함 하나 없이 꽉 짜인 구성에 엄마를 대하고 나를 대하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묘사한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청소년 문집 같은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자신의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식의 가식적인 글을 읽을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면서도 마지막엔 자신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 지은이의 서툰 결말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뻔한 소재와 교과서적인 결말이지만, 뻔한 걸 뻔하지 않게 느끼게 쓰는 글, 결국은 가장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교과서적인 게 아닐까. 아무튼 전은자양의 다음 소설을 기대해본다.
<거미줄>도 시작이 뻔하긴 마찬가지이다. 소설에서 너무 흔하디 흔한 불구 엄마, 그리고 딸과의 갈등, 사회적인 모순 등등... 소설로서는 좀 청소년들이 쉽게 가는 건 아닌지 좀 부담감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건 결국 이 소설이 가진 힘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화해로 가는 방법이나 감정처리 또한 깔끔하고 무리가 없다. 청소년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스토리를 끌어가는 힘이 자연스럽고 담담하다. 서툴다거나 서둘러 마감한 느낌도 없고, 정말 어디 한구석 빈 데가 없다. “오늘은 제가 할게요”로 표현되는 화해의 방법도 무리한 갈등을 표출하고 무리하게 결론짓는 것보다 더 무덤덤하면서 힘이 느껴진다. 이 정도의 소설 창작 수준으로 다른 소재를 잡았더라면 그 힘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도 즐겁다. 청소년의 십대 감각도 100% 느끼게 해주면서 소설적인 완성도로 꽉 찬 소설이었다. 조세연양(또는 군)의 또 다른 ‘껌 씹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