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작가는 처음부터 ‘캐비닛’이란 타이틀에서 대단한 걸 기대하지 말라며 이건 그저 평범한 캐비닛일 뿐이라고 굳이 설명까지 덧붙인다. 왜 알잖아요? 그저 그런 캐비닛이요... 하지만 그게 한국판 X 파일들을 담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묘한 인물들, 사건들을 죽 열거하고 결국 그 진원지를 파악하고 이용하려는 권력 간의 갈등, 쫓기는 주인공의 고난과 도주... 그 모든 이야기가 X 파일 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이야기는 화산폭발이 일어나 도시 하나가 사라질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죄수, 루저 실바리스로부터 시작한다. 거창한 시작만큼이나 이야기는 있을법하지 않은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불쑥 단번에 끌어들인다. 아니 그럴 듯한 것이 있을법한 이야기들뿐이다. 돌연변이니, 심토머니, 토포러니... 용어는 낯설지만 이 21세기에 있을법하지 않은 사실이 얼마나 될까.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나는 사람이며, 시간이 사라지는 사람이며, 입안에서 도마뱀을 키우는 사람이며, 메모리 모자이커며... 우리가 흔히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경우들은 아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얼마나 그럴듯한지 마치 그들이 우리 곁에서 살고 있는 것 같고, 나도 저 중에 어느 하나에는 소속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 이유가 우리 같은 평범한 회사원 하나를 작가가 은근슬쩍 화자로 끌어들여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불편하면 그저 구경하면 되는 것이고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함께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작가의 기막힌 수법이다.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대사 하나 하나 말맛이 그득하고, 사건이나 심리 변화까지도 화끈하다.
끝 간 데를 모르고 발전하는 과학, 복잡해져만 가는 정신세계를 그려 보이겠다는 문학, 흥밋거리를 찾아 끝없이 펼쳐대는 예술적 상상력의 한 가운데 소용돌이 속에서 현대인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감정, 느낄 수 있는 어떤 사건 같은 것들을 작가는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이 시원하게 긁어준다. 도플갱어 이야기에는 어떤 남자가 자신과 외모뿐 아니라 식성이나 취향까지 똑 닮은 쌍둥이 같은 인물을 만나 “즐겁고 기묘한” 섹스를 나누고 위로를 받는 경우이다. 열심히 현대 삶을 살며 달리다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잊을 경우를 대비해 그런 또 다른 자아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럴듯한 발상 같기도 하다.
결국 작가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무엇일까...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혹시 역설적으로 당신의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고 고귀하게 살라는 메시지 같은 게 아닐까. 좀 단순하지만 그런 흔적 같은 것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졌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도 좋다는 것도 아니다. 혹자는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이 많은 다른 종류의 인간군상을 보여주면서, 결국 역설적으로 나와 너, 정말 다를 것 하나 없는 ‘그저 그런, 고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무덤을 보는 사람은 드물어요.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무덤을 본 사람은 삶을 고귀하게 여길 줄 알거든요.”
심토머 얘기를 해주며 여러 가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화자는 말한다. “저는 심토머인가요?” “아뇨, 당신은 심토머가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아직 이 도시에서 견딜 만합니다.”
세상 끝에 숨어 지내는 화자에게 박사는 말한다. “그냥 자네의 시간을 견뎌봐.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한 거니까.” 캐비닛처럼 말이다...
작가에게 한 마디,
귀싸대기라니요?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인데... 삼천포(이제 공식 명칭은 사천! 왜 그 좋은 이름을 바꿨을까. 우리의 삼천포, 김언수가 작가 생활을 꾸릴 그곳을 말이지...)에서 또 어떤 소식이 들려올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또 다른 캐비닛 안의 파일들이 언제쯤 나올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