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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 음악과 과학의 만남
로베르 주르뎅 지음, 채현경.최재천 옮김 / 궁리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제목만으로는 책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음악 활동의 의미에 관한 책이라는 것만 알려줄 뿐 방법론에 따라 사변적인 철학서도 될 수 있고 분석적 기호학이나 인류학, 때론 심리학 서적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의 눈으로 음악 활동의 여러 일면들을 고찰하고 있다.
과학과 음악은 언뜻 보아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만드는 모든 행위는 과학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 청각이라는 감각에서 소리와 음악의 구별을 거쳐 복잡한 악곡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베르 주르뎅의 이 책은 정확히 이런 계열을 따른다. 각 장의 논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소리에서 시작하여 음악의 종착지인 쾌락에서 끝나며, 음향학, 두뇌 과학, 인지 심리학 같은 학문적 방법이 동원된다.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악기의 발전을 진화에 비교한다거나 콘서트홀과 음악 스타일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 화성과 리듬의 인식을 비교하는 대목, 작곡가의 천재성과 두뇌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뇌 손상으로 인한 실음악증 환자의 사례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핑크 팬더>의 주제를 분석하면서 좋은 선율, 좋은 화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관습과 기대감에 의해 추정하는 것도 신선한 접근이다. 책의 상당 부분은 음악 활동을 할 때 두뇌에서 일어나는 일의 설명에 할애하는데, 아직 연구가 진행중인 분야라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두뇌가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특히 리듬에 관한 장에 나오는 시간 인식의 메커니즘, 연주 시 운동신경계의 자율적인 반응, 그리고 신경계의 작용에서 감정의 역할을 논하는 대목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제목의 궁극적인 질문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자는 자칫 서양 음악의 우월성 주장으로 빠질 위험을 피하기 위해 비유럽권 음악에 대해 배려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복잡한 형식과 구조에 대한 옹호는 여전하다. 이것은 곧바로 테크놀로지와 대중 음악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는데, 이는 대중 음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음색에 대한 경시와 맞닿아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악기를 설명하면서 음색에 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악기를 살펴보면 인간이 어떤 음색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왜 어떤 악기는 금방 잊혀지지만 어떤 악기는 오랫동안 사랑 받는가? 문화권에 따라 개발되고 선호되는 악기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악기는 해당 지역 언어의 음성적 요인(발음, 억양)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내가 음악적 경험의 궁극적인 지점이 음색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분명 음악적 경험에 관한 흥미진진한 보고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