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정의 교집합을 찾아라
이 소설을 읽은 (혹은 읽을) 독자들은 십중팔구 생소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테니 작가 소개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karliagnemma.com)에 나와 있는 소개글과 기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가의 이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칼 인옘마는 1972년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기계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동화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미시간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뒤 MIT에 진학하여 로봇 공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단편들은 주로 박사과정 때 씌어졌는데, 《파리리뷰Paris Review》, 《조트로프: 올스토리Zoetrope: All-Story》, 《원스토리One Story》 등 명망 있는 문학잡지에 실려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는 2001년 《파리리뷰》가 선정한 신인상Plimpton Prize을 수상했고, 메이저 출판사인 호튼 미플린은 〈질코프스키 정리〉를 2002년 미국 최고의 단편 소설로 꼽았다. 이 두 단편은 여러 단편들을 함께 모아 펴내는 몇몇 선집에도 수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한편 그는 《플레이보이》의 칼리지 픽션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미국국립예술재단과 매사추세츠 문화원에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의 단편들은 2003년 다이얼 출판사에서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바로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공학이다. 그는 MIT 기계공학과의 연구원과 강사로 일하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2003년에는 과학잡지 《시드SEED》에서 과학을 재정의한 열여섯 명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 그는 2009년 화성 탐사선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칼 인옘마의 이력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그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단편집의 성격이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학자와 소설가라는 이중생활은 그의 소설에 흥미롭게 반영되어 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예컨대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의 주인공은 수학자답게 사랑을 벤다이어그램과 방정식으로 표시하고, 〈골상학자의 꿈〉의 주인공은 두개골의 모양을 통해 사람의 성격을 추론해내려고 한다. 〈삼림학자 그루피〉는 수목의 분류법에 매혹된 로맨티스트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한편 〈광부의 아내〉의 주인공은 광산에서 일을 마치고 밤이면 수학 증명에 몰두하며(마치 공학자 일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는 작가처럼), 〈허기 실험〉의 주인공인 의사는 소화 기관의 작용을 밝히기 위해 잔인한 실험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를 쓸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렇듯 그의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는 인물들은 합리성을 대표하는 과학에 어떤 식으로든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생활, 특히 애정 생활은 늘 삐걱거린다. 일례로 떠돌이 골상학자는 사랑의 이론을 개발했지만 사랑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과학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하며, 한 주인공은 “너무 복잡해서 수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는 결국 “자연에는 설명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학과 소설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얼핏 SF를 연상시킬지도 모르겠지만 이 단편집은 과학소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과학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모티브가 아니라 소재일 뿐,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삶의 낭만성이다. 우리는 소설 곳곳에서 아름다운 문학적 발상들을 만나게 된다. 〈질코프스키 정리〉의 헨더슨은 교회의 아치형 천장의 기하학 구조를 올려다보며 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삼림학자 그루피〉의 케이는 기다리던 인연을 만난 순간 바람 수분의 우연성을 떠올린다. 〈고백식 접근법〉의 주디스는 고통의 나락에 떨어질 때 아파트 건물의 벽에 드리워진 찬란한 햇빛을 기억해내고, 〈광부의 아내〉의 니클라스는 어릴 시절 들판에서 개똥벌레들이 그리던 포물선을 본 기억을 평생 마음속에 품는다. 이런 순간들은 혼란스러운 삶에서 질서를 발견했을 때 얻게 되는 찰나의 황홀한 체험이다. 에피파니라 불러도 좋을 깨달음의 순간들.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관된 문학 세계다. 주인공들이 과학과 연관된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이지만, 그것 말고도 그의 소설에는 비슷한 점들이 많다. 학자, 학술대회, 논문, 죄책감, 미행, 성경, 삼림지대, 기차, 광부, 인디언, 호수 등이 그의 소설을 하나로 묶는 재료들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여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은 변주곡 형식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주제에 이어 제1변주는 시간적 배경을 현대에서 19세기로 바꾸고(시간 변주), 제2변주는 주인공을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설정하며(성별 변주), 제3변주에서는 사랑에 버림받는 인물에서 사랑을 쟁취하는 인물로 변화를 주고(성격 변주), 제4변주는 교차편집과 일지 형식을 병행한다(서술 변주). 작가는 주제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각 변주마다 다양한 개성을 불어넣을 줄 아는 능숙한 작곡 솜씨를 과시한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많은 소설들은 미국 미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와이오밍의 자연경관과 분리할 수 없듯, 칼 인옘마의 소설은 미시간의 풍경과 떼어놓을 수 없다. 거대한 호수로 둘러싸이고 삼림지대가 넓게 펼쳐진 미국 중서부 지방의 풍경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번역을 하는 동안 서프전 스티븐스Sufjan Stevens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그의 촉촉한 목소리와 다채롭고도 매혹적인 음향이 미시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하는 내내 내게 훌륭한 사운드트랙이 되어주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정보를 주고자 한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작가는 19세기 미국에 큰 매혹을 느끼고 있으며, 몇몇 단편들에 골상학, 탐광자, 의학 실험의 이야기가 나온다. 광물을 찾아 신대륙을 누빈 사람들 이야기나 신체 해부에 관한 오싹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이지만, 골상학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골상학은 두개골의 구조를 연구하여 사람의 성격을 추론해내는 학문으로 18세기 말 프란츠 갈Franz Joseph Gall이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세기 중반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수천 명의 골상학자들이 신대륙 각지를 여행하며 사람들의 두개골을 봐주고 그들의 재능, 성격, 기질을 말해주었는데, 이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커지면서 사람들 간의 접촉이 늘어 객관적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골상학이 얼마나 인기였던지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르고, 직업을 선택하고, 직원을 뽑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골상학을 이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골상학자의 꿈〉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는 현재 워너 브라더스에서 영화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칼 인옘마는 1840년대 미시간을 배경으로 과학 원정대의 이야기를 다룬 첫 번째 장편 소설을 마쳤고, 현재 골상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그의 후속작을 번역하는 행운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영광을 얻은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작가의 글로 이 글을 정리할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사실을 탐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학적 발견은 감정에 의해 이루어질 때가 많다. 질투, 두려움, 욕망은 차분한 성찰만큼이나 과학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삶과 주위 사람들의 삶에 뒤얽혀 있는 과학의 신비를 벗겨내려는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또한 나는 비록 과학이 수많은 세월 동안 진화해왔지만 연구에 대한 근심과 동경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