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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할 때 소장 가치를 꼼꼼하게 따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고 책장 한 쪽에 처박아둔 책들이 적지 않다. 책이 다른 문화재에 비해 시류를 타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신간 정보를 보고 활활 타올랐던 독서욕이 이런저런 일에 밀려 수그러들면 웬만해서는 그 책을 다시 꺼내들기가 쉽지 않다. 읽어야 할 책은 계속해서 나오고, 관심사는 변덕스럽게 바뀌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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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5-1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하고 비슷하시네요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고...^^

flaneur 2007-05-13 0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은 신간이 나오면 끼워주기 이벤트가 많아서 쌓아두기만 하는 책들이 갈수록 늘어나지요.
 

이성과 감정의 교집합을 찾아라

이 소설을 읽은 (혹은 읽을) 독자들은 십중팔구 생소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테니 작가 소개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karliagnemma.com)에 나와 있는 소개글과 기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가의 이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칼 인옘마는 1972년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기계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동화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미시간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뒤 MIT에 진학하여 로봇 공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단편들은 주로 박사과정 때 씌어졌는데, 《파리리뷰Paris Review》, 《조트로프: 올스토리Zoetrope: All-Story》, 《원스토리One Story》 등 명망 있는 문학잡지에 실려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는 2001년 《파리리뷰》가 선정한 신인상Plimpton Prize을 수상했고, 메이저 출판사인 호튼 미플린은 〈질코프스키 정리〉를 2002년 미국 최고의 단편 소설로 꼽았다. 이 두 단편은 여러 단편들을 함께 모아 펴내는 몇몇 선집에도 수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한편 그는 《플레이보이》의 칼리지 픽션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미국국립예술재단과 매사추세츠 문화원에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의 단편들은 2003년 다이얼 출판사에서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바로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공학이다. 그는 MIT 기계공학과의 연구원과 강사로 일하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2003년에는 과학잡지 《시드SEED》에서 과학을 재정의한 열여섯 명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 그는 2009년 화성 탐사선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칼 인옘마의 이력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그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단편집의 성격이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학자와 소설가라는 이중생활은 그의 소설에 흥미롭게 반영되어 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예컨대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의 주인공은 수학자답게 사랑을 벤다이어그램과 방정식으로 표시하고, 〈골상학자의 꿈〉의 주인공은 두개골의 모양을 통해 사람의 성격을 추론해내려고 한다. 〈삼림학자 그루피〉는 수목의 분류법에 매혹된 로맨티스트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한편 〈광부의 아내〉의 주인공은 광산에서 일을 마치고 밤이면 수학 증명에 몰두하며(마치 공학자 일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는 작가처럼), 〈허기 실험〉의 주인공인 의사는 소화 기관의 작용을 밝히기 위해 잔인한 실험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를 쓸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렇듯 그의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는 인물들은 합리성을 대표하는 과학에 어떤 식으로든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생활, 특히 애정 생활은 늘 삐걱거린다. 일례로 떠돌이 골상학자는 사랑의 이론을 개발했지만 사랑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과학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하며, 한 주인공은 “너무 복잡해서 수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는 결국 “자연에는 설명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학과 소설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얼핏 SF를 연상시킬지도 모르겠지만 이 단편집은 과학소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과학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모티브가 아니라 소재일 뿐,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삶의 낭만성이다. 우리는 소설 곳곳에서 아름다운 문학적 발상들을 만나게 된다. 〈질코프스키 정리〉의 헨더슨은 교회의 아치형 천장의 기하학 구조를 올려다보며 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삼림학자 그루피〉의 케이는 기다리던 인연을 만난 순간 바람 수분의 우연성을 떠올린다. 〈고백식 접근법〉의 주디스는 고통의 나락에 떨어질 때 아파트 건물의 벽에 드리워진 찬란한 햇빛을 기억해내고, 〈광부의 아내〉의 니클라스는 어릴 시절 들판에서 개똥벌레들이 그리던 포물선을 본 기억을 평생 마음속에 품는다. 이런 순간들은 혼란스러운 삶에서 질서를 발견했을 때 얻게 되는 찰나의 황홀한 체험이다. 에피파니라 불러도 좋을 깨달음의 순간들.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관된 문학 세계다. 주인공들이 과학과 연관된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이지만, 그것 말고도 그의 소설에는 비슷한 점들이 많다. 학자, 학술대회, 논문, 죄책감, 미행, 성경, 삼림지대, 기차, 광부, 인디언, 호수 등이 그의 소설을 하나로 묶는 재료들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여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은 변주곡 형식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주제에 이어 제1변주는 시간적 배경을 현대에서 19세기로 바꾸고(시간 변주), 제2변주는 주인공을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설정하며(성별 변주), 제3변주에서는 사랑에 버림받는 인물에서 사랑을 쟁취하는 인물로 변화를 주고(성격 변주), 제4변주는 교차편집과 일지 형식을 병행한다(서술 변주). 작가는 주제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각 변주마다 다양한 개성을 불어넣을 줄 아는 능숙한 작곡 솜씨를 과시한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많은 소설들은 미국 미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와이오밍의 자연경관과 분리할 수 없듯, 칼 인옘마의 소설은 미시간의 풍경과 떼어놓을 수 없다. 거대한 호수로 둘러싸이고 삼림지대가 넓게 펼쳐진 미국 중서부 지방의 풍경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번역을 하는 동안 서프전 스티븐스Sufjan Stevens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그의 촉촉한 목소리와 다채롭고도 매혹적인 음향이 미시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하는 내내 내게 훌륭한 사운드트랙이 되어주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정보를 주고자 한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작가는 19세기 미국에 큰 매혹을 느끼고 있으며, 몇몇 단편들에 골상학, 탐광자, 의학 실험의 이야기가 나온다. 광물을 찾아 신대륙을 누빈 사람들 이야기나 신체 해부에 관한 오싹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이지만, 골상학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골상학은 두개골의 구조를 연구하여 사람의 성격을 추론해내는 학문으로 18세기 말 프란츠 갈Franz Joseph Gall이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세기 중반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수천 명의 골상학자들이 신대륙 각지를 여행하며 사람들의 두개골을 봐주고 그들의 재능, 성격, 기질을 말해주었는데, 이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커지면서 사람들 간의 접촉이 늘어 객관적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골상학이 얼마나 인기였던지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르고, 직업을 선택하고, 직원을 뽑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골상학을 이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골상학자의 꿈〉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인간의 낭만적 교감의 본성에 대하여〉는 현재 워너 브라더스에서 영화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칼 인옘마는 1840년대 미시간을 배경으로 과학 원정대의 이야기를 다룬 첫 번째 장편 소설을 마쳤고, 현재 골상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그의 후속작을 번역하는 행운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영광을 얻은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작가의 글로 이 글을 정리할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사실을 탐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학적 발견은 감정에 의해 이루어질 때가 많다. 질투, 두려움, 욕망은 차분한 성찰만큼이나 과학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삶과 주위 사람들의 삶에 뒤얽혀 있는 과학의 신비를 벗겨내려는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또한 나는 비록 과학이 수많은 세월 동안 진화해왔지만 연구에 대한 근심과 동경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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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파시 능력자의 추락과 비상, 고통과 황홀경의 이야기

내가 로버트 실버버그와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플레이보이 SF 걸작선>>에 수록된 <지아니>라는 단편을 통해서였다. 그 전에도 그의 이름을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적은 있었지만 그는 내게 수많은 SF 작가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첫 학기 수업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데 우리말로 된 소설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가족들에게 소포로 책을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수록된 많은 단편들 가운데 실버버그의 글은 단연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8세기 초의 클래식 작곡가 페르골레지가 현대에 환생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이 작품은 당시 대중음악을 공부하면서 클래식과 팝 음악의 가치 체계의 충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의 구미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실버버그의 단편이 이런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실버버그라는 작가에게 이어졌다. 가까운 서점에 들러 그의 책을 둘러봤는데, 실버버그의 대표작으로 소개된 책들 가운데 금방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다잉 인사이드>>(1972)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과 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나는 셀리그라는 소심한 초능력자의 개성에 매료되었고, 실버버그의 능수능란한 화술에 빠져들었다. 훗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틈틈이 영국 각지를 돌아다닐 때 늘 이 책을 들고 다녔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공연을 보러 글래스고에 갈 때는 셀리그와 토니의 애시드 여행 이야기를 읽었고, 웨일스에서 열리는 슈퍼 퍼리 애니멀스의 공연을 보러 가는 길에는 셀리그의 동굴을 슬쩍 훔쳐봤다. 그렇게 나의 영국 생활과 하나가 된 실버버그의 이 책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지자 나는 번역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의 간절한 소망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까지의 이야기는 통속적이고 평범한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로버트 실버버그를 소개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그가 엄청나게 많은 책을 낸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SF 소설만도 100권이 넘으며 논픽션과 그가 편집한 선집도 60권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뉴욕 브루클린 출생으로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스물한 살 때 휴고상에서 ‘가장 유망한 신인 작가’ 부문을 수상하여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다. <어메이징 스토리스>, <판타스틱>, <사이언스 픽션 어드벤처> 같은 SF 잡지에 수많은 필명을 써가며 주로 청소년 대상의 글을 기고해온 그는 SF 작가 랜들 개릿과 공동 집필을 하기도 했고, 1960년대에는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 소설과 역사 논픽션이라는 상이한 분야에도 손을 댔다.

실버버그가 본격적으로 SF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이다. 그는 우주비행사와 소녀의 로맨스에 뱀파이어 이야기를 접목시킨 <<가시Thorns>>(1967)에 이어 정치범들을 시간 여행으로 감금시킨다는 내용의 <<혹스빌 스테이션Hawksbill Station>>(1968)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후 휴고상 수상작인 동명의 중편을 개작한 <<나이트윙Nightwings>>(1969), 두 지성체의 이질적인 문화를 통해 인류학적, 종교적 주제를 탐색한 <<지구로의 하강Downward to the Earth>>(1970), 인격이 금지된 행성에 관한 이야기인 네뷸러상 수상작 <<변화의 시간A Time of Changes>>(1971),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밀집된 인구들이 살아가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인 <<월드 인사이드The World Inside>>(1971), 애리조나 사막으로 영생을 찾아 떠나는 네 명의 젊은이의 이야기인 <<두개골의 서The Book of Skulls>>(1972), 그리고 이 책 <<다잉 인사이드>>까지 걸작을 연달아 쏟아내며 실버버그는 그 어떤 SF 작가보다도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실버버그는 <<발렌타인 경의 성Lord Valentine's Castle>>(1980), <<발렌타인 대신관Valentine Pontifex>>(1983) 같은 판타지 연작 소설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논픽션적 관심사였던 고대 역사를 소재로 한 <<길가메시 왕Gilgamesh the King>>(1984), 네뷸러상 수상작을 표제로 내세운 중편 모음집 <<비잔티움을 향한 항해Sailing to Byzantium>>(1985) 등으로 꾸준한 필력을 과시했다. 그 밖에도 그는 아내인 캐런 헤이버와 함께 편집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훌륭한 선집들을 내놓았으며, 1967-1968년에 미국 SF작가 협회의 회장을 맡았고, 1970년 세계 SF컨벤션의 주빈으로 초청된 바 있다.

로버트 실버버그는 미국에서 SF 문학의 황금기를 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지만, 정작 그의 대표작인 <<다잉 인사이드>>는 SF 소설의 장르적인 특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텔레파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가까운 미래라는 점을 제외하면 <<다잉 인사이드>>는 현대인의 불안정한 심리와 소통의 문제를 다룬 본격문학(이 말이 거슬린다면 장르문학에 반대되는 그 무엇)에 가깝다. 1935년 뉴욕에서 출생한 유대인이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설정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의 이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소외감과 불안을 나타내기 위해 데이비드 셀리그를 내세워 가상의 자서전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인공이 펼치는 모험의 재미에 빠져드는 방법이 있고, 주인공에 일체감을 느껴 그의 감정과 갈등에 공감하는 방법도 있으며, 소설 배후에 드러난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를 간파하는 것, 혹은 순전히 작가가 글을 풀어가는 솜씨에 매료되는 것도 소설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내가 <<다잉 인사이드>>에 끌린 것은 셀리그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신기한 능력을 타고난 그는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젊은 시절을 소진한 뒤, 그 능력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야 능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제까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왔고 세상과의 소통의 끈이 되어주었던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하자 심한 존재론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다. 만약 그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대체 나는 누굴까? 그 능력이 없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

<<다잉 인사이드>>는 성장에 관한 은유다.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세계를 깨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모든 사람은 성장에 대해 불안과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는 평생 미성숙의 상태로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남들보다 일찍 삶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셀리그는 뒤늦게 성장의 고통을 겪는 자다. 평생을 세상과 적대적인 관계로 살아오다가 마흔 살에 가까워서야 세상과 화해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여동생과의 해묵은 갈등을 풀고 헤어진 옛 연인과도 상상으로나마 화해한다. 그런 점에서 <<다잉 인사이드>>를 <<호밀밭의 파수꾼>>(1951)의 어덜트 버전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이 책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서 텔레파시 능력은 젊음이 갖는 무소불위의 힘을 나타낸다. 본문에서도 셀리그와 주디스가 나누는 대화에서 그 능력을 성적 은유로 해석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대학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셀리그는 유난히 젊음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어느덧 자신의 세대가 사회 지배층으로 편입되었음을 발견하고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점차 왜소해지는 자신을 깨닫는 셀리그의 모습은 바로 필멸의 존재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또한 어쩌면 그것은 일찍이 SF계의 촉망받는 천재로 등장하여 온갖 명성을 누려온 실버버그 본인의 환멸과 불안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다잉 인사이드>>를 한 개인에 한정된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은 현대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에 있다. 셀리그가 일생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키티와 토니를 만난 해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키티와 로맨스가 있었던 1963년은 셀리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구 사회를 급습한 엔트로피의 혼돈과 철학적 절망의 긴 가을이 오기 전 희망과 활기로 넘쳤던 마지막 여름”이었고, 토니를 만난 1968년은 “모든 세상이 조각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닫게 된 바로 그 해”였다. 1963년에서 1968년까지는 미국 현대사에서 혼란스러운 격동의 시기였다. 청년들과 흑인들과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힘차게 외친 대항문화의 시대였고, 베트남 전쟁과 암살과 마약과 히피와 로큰롤의 시대였으며, 미소 간의 우주 개발 경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대였다. 셀리그는 기성세대와 사회의 속물근성에 환멸을 느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무분별함에도 냉소를 보내는 사람이고, 소수 민족에 대한 편견도 솔직하게 드러낸 사람이다. 이와 같은 환멸과 냉소와 편견이 그를 더욱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개인과 사회의 합일점을 절묘하게 통합한 로버트 실버버그의 절정에 오른 글 솜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쓰며 다져진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은 여기서 반짝반짝 빛을 낸다. 현재와 과거, 1인칭 서술과 3인칭 서술(때로는 2인칭 서술까지), 주관적 고백과 객관적 설명을 오가며 진행되는 문장은 셀리그의 분열적인 심리 상태에 걸맞게 능청스럽게 이죽거리다가 의기소침하게 냉소적으로 돌변한다. 작가는 셀리그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기 위해 딱딱한 논문 형식과 문학 작품의 인용, 자기 고백적 산문체를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얻어진 셀리그의 심리 묘사는 놀라우리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다. 이런 실버버그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19장이다. 셀리그의 가장 개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은 인칭과 존칭을 달리하며 순간적인 심정의 변화를 절묘하게 통제하여, 작가가 바로 옆에서 셀리그의 삶을 그대로 중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신경하게 툭툭 던지는 실버버그의 즉흥적인 필치와 단순한 문장의 매력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대목이다.

텔레파시와 같은 초감각 능력은 SF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이템이다. 본문에서도 흥미롭게 언급된 바 있는 베레스퍼드의 <<햄프덴셔 경이>>(1911)와 스테이플던의 <<이상한 존>>(1935)을 비롯하여 국내에 번역 소개된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1953)와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1953), 그리고 온갖 초인들이 등장하는 코믹스와 심지어 <왓 위민 원트> 같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텔레파시 능력은 우리들을 매혹시키는 상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잉 인사이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우디 앨런의 영화 <젤리그>(1983)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연상 작용은 주인공의 이름이 우연히 비슷하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일단 연상 작용이 가동되고 나니 비슷한 점들이 발견된다. 누군가의 옆에 다가가면 그 사람의 신체를 닮아버리는 ‘인간 카멜레온’ 젤리그 역시 셀리그와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물론 쉽게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 속에, 익명성 속에 숨어버리는 젤리그와 달리 셀리그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세상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며 소외로 고통 받는 인물이다. 어쩌면 셀리그(젤리그가 아니라)야말로 우디 앨런적인 인물에 더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디 앨런과 로버트 실버버그가 모두 뉴욕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점, 그래서 <젤리그>와 <<다잉 인사이드>>가 거의 대부분 뉴욕을 무대로 전개된다는 점 또한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이제까지 국내에 소개된 실버버그의 작품으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중편을 장편으로 확장시킨 소설과 몇 편의 단편이 있을 뿐, 그가 남긴 1970년대 걸작들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미국의 현대 SF 작가들 가운데 가장 다재다능한 실버버그의 진가가 이 책을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진다면 번역자로서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기회를 내게 열어준 책세상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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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이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으로 분주한 해라면 2005년 국내 음악계는 말러와 바그너의 해였다. 몇 년 전부터 지속된 말러의 열풍이 변함없이 인기를 이어갔고, <니벨룽의 반지> 초연으로 바그네리안들을 설레게 만든 해였다. 이런 현상은 출판에도 반영되어 말러와 바그너에 관한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김문경이 쓴 <구스타프 말러 2: 황금시대>는 지난해의 1권에 이어 말러의 전성기인 빈 시절을 다루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를 재구성한 전기와 악곡을 분석한 부분으로 나뉘며, 감상자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주기 위한 책이다. 한편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은 말러와 함께했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말러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두 위대한 예술가의 교감을 엿볼 수 있는 내밀한 전기이다. 이렇듯 분석적인 책과 내밀한 책은 상호보완적인 방향에서 말러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진입장벽이 있어서 <구스타프 말러 2>는 말러의 음악에 대한 상당한 이해(그것도 분석적인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읽어내기가 어려우며, 발터의 전기는 책이 씌어진 정황과 시대 맥락을 고려하고 읽어야 한다. 말러의 세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책은 아직도 소개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어디선가 말러의 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바그너에 관한 책은 양적으로 더 풍부한데 주목할 책은 버나드 쇼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와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가 쓴 <트리스탄 코드>이다. 바그너는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필가들, 사상가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중 버나드 쇼는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는 영국 대중들에게 바그너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 씌어진 해설서로 당시 바그너가 어떤 식으로 이해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트리스탄 코드>는 음악이 아니라 사상적인 측면에서 바그너에 접근한다. 청년 독일단 시절에서 시작하여 쇼펜하우어를 거쳐 니체에 이르는 그의 사상적 여정을 그의 예술관의 변화와 관련하여 추적하고 있다. 비록 바그너의 음악에 관해 세세한 지침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 바그너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제시함으로써 음악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바그너는 누구보다도 이런 책이 필요한 작곡가이다.

 

 

 

 

출판 시장에서 점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분야가 평전인데 예술가의 전기도 예외가 아니라서 괜찮은 전기들이 몇 권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반가운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글렌 굴드와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를 다룬 책이다. 정신과 의사인 피터 F. 오스왈드가 쓴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은 굴드의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자료와 해석을 곁들여 평전 본연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이 책의 미덕은 굴드에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과 음악 애호가들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점이다. 반면 <리흐테르>는 예술가 다큐멘터리 작가로 유명한 브뤼노 몽생종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회고록으로 내밀한 성격의 책이다. 수도승의 이미지로 알려진 리흐테르를 좀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면서 동시에 구성 자체가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책이기도 하다. 2부의 음악수첩은 두고두고 참고할 만한 훌륭한 자료이다.

성악가는 육성을 매개로 하는 음악가라서 청중들에게 좀더 친근한 이미지로 기억되고 스타 시스템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성악가들은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스타로서도 유혹적이다. 위대한 성악가이자 '불꽃처럼 화려한 삶'을 영위한 마리아 칼라스의 생애를 다룬 앤 에드워드의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 애호가들보다는 스타들의 굴곡진 삶에 관심 있는 자들에게 더 매혹적인 평전이다. 칼라스의 평전이 극적인 드라마로 다가온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바리톤으로 성공한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자서전 <빅맨 빅보이스>는 잔잔한 드라마에 가깝다.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로서 온갖 편견들을 극복하고 세계 무대 정상에 오른 이야기는 다소 진부한 면이 있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감상적이지는 않다. 담담하게 위트를 섞어가며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이 책은 화려한 성악가로서의 삶 이면의 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편안한 에세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전기는 조금 특별하다. 음악가 대신 악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악기가 스트라디바리우스 현악기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 명기들은 그 어떤 음악가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토비 페이버의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다섯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첼로가 주인공이고, 볼프 본드라체크의 <첼로 마라>는 '마라'라는 이름의 첼로가 주인공이다. 대단히 비슷한 성격의 책들인데 논픽션 구성을 취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현악기 명기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들과 역사적 사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면, <첼로 마라>는 악기를 1인칭 화자로 내세운 연극적인 구성을 취한다. 음악에서 악기가 갖는 위상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들로 캐주얼하게 읽을 수 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 서적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발간되었지만 잡지에 실린 글을 재활용하거나 외국의 자료를 적당히 참고해서 쓴 책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국내 필자들이 음악 단행본 집필에 서서히 뛰어드는 추세가 보이며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은 풍월당 주인 박종호이다. <유럽음악축제 순례기>는 음악 여행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책을 내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충분한 자료와 내용이 준비된 가운데 쓴 책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책 곳곳에 필자의 애정(종종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이 넘친다. <유럽음악축제 순례기>가 유럽 음악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의 필독서라면 <불멸의 오페라>는 오페라 애호가들의 필수 지침서이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방대한 분량에서 보듯 오페라를 실질적으로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수록하고 있다. 항목별로 찾아볼 수 있어서 단행본이라기보다는 사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책머리에서 필자가 쓴 것처럼 오페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쉽지만 다른 책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몇 년 전 <무지카 프라티카>라는 책이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채넌의 <음악 녹음의 역사>는 레코딩이라는 매체가 20세기 음악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하는 책이다. 지금은 레코딩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된 1995년만 하더라도 레코딩 매체에 주목한 저술은 흔치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음악 문헌에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는 선구적인 저술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초의 디지털 환경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오가며 레코딩의 역사와 그것이 갖는 문화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이 책은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훌륭한 저술이다.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소리의 자본주의>가 레코딩 매체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토머스 포리스트 켈리의 <음악의 첫날밤>은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작품이 초연되던 상황을 재구성한 흥미로운 저술이다. 사실 음악에서 초연이라는 것은 미술의 원본과 같은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 전혀 아니지만 당시 음악이 작곡되고 연주되고 감상되던 상황으로 돌아감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음악 행위가 어떤 역사성과 의미가 있는지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음악의 의미를 절대시하고 해석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논의거리를 제공하는 책이며, 과거의 음악을 좀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해준다. 학술적인 측면과 대중성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두 권의 책은 개인적으로 음악 단행본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책은 대중음악 서적들이다. 클래식 서적도 음악 출판물에서 변두리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대중음악 서적의 처지에 비하면 호사스럽다. 국내에서 대중음악 서적의 자리는 '대중'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할 정도로 열악하다. 그럼에도 2005년에는 의미 있는 책들이 몇 권 소개되어 궁핍한 자리를 채워주었다.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이 집필한 <한국 팝의 고고학 1960>과 <한국 팝의 고고학 1970>은 국내에서 발간된 대중음악 연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술로 손색이 없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필자들의 정성과 노고가 전달되는 책인데, 그것은 대중음악이 문화적인 인식이 없던 분야라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차적인 자료를 찾아내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고작 3,40년 전 역사를 다루면서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한국 팝'이라는 말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국내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미8군 부대에서 시작하여 음악 감상실과 그룹 사운드 전성기를 지나 대마초 파동과 신촌의 언더그라운드에서 마감된다. 일관된 관점을 따라 역사를 정리하기보다는 시대를 복원해내는 일에 일차적인 중점을 두고 있으며, 수많은 사진과 인터뷰 자료의 가치만으로도 빛나는 책이다.

사이먼 프리스, 윌 스트로, 존 스트리트가 편집을 맡은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는 대중음악을 단순히 듣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이해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 기본 밑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책이다. 대중음악 연구는 다양한 분야가 만나서 교류하는 학제간 연구의 대표적인 예로서, 이 책은 팝과 록의 중요한 개념들, 대표적인 장르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교양과목 수준에서 집필하고 있는 책이다. 통시적 접근과 공시적 접근을 두루 취하는 이 책은 대중음악의 시대적 변화는 물론 우리 시대에 대중음악이 왜 중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좀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내가 쓴 후기를 참고하라.)

평전 시장의 확대는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몇 권의 전기들이 나왔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책은 예일 대학의 교수 존 스웨드가 쓴 <마일즈 데이비스, 거친 영혼의 속삭임>이다. 예전에 그의 자서전이 국내에 소개된 적도 있지만, 이 책은 평전이 갖춰야 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책이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예술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의 호흡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가장 창조적이며 복잡한 인물의 심성을 꼼꼼하게 펼쳐 보인다. 이 정도의 깊이를 보여주는 평전을 매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외에도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마이라 프리드만이 쓴 <제니스 조플린> 평전이 소개되었다. 사실 이 두 권의 책은 아쉬움이 조금 든다. 밥 딜런의 자서전은 미국에서 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책이지만, 이미 그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왔고 대중들이 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이 같은 책이 적절한 독자층을 만나기가 어렵다. 제니스 조플린도 마찬가지다. 마이라 프리드만의 평전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생을 충실히 복원하는 데 머물고 있을 뿐 조플린이라는 인물에 대해 기본적인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의 욕구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비단 이 두 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초적인 자료조차 거의 소개되지 않은 국내에 절실히 요청되는 책은 아티스트의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라 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처럼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집필한 책이다. 어쨌든 2005년은 평전에서 비틀즈와 존 레논의 강박에서 벗어난 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위안하고 싶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아직 소개되어야 할 뮤지션과 밴드가 무궁무진하게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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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더불어 음반리뷰도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flaneur 2006-01-1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은 <<The Cambridge Companion to Pop and Rock>>(2001)을 번역한 것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케임브리지 지침서’라는 이름으로 펴내는 시리즈 중 하나이다. 저자들의 집필 의도와 무관하게 이 책은 대중 음악 강의용으로 적합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사이먼 프리스의 <<사운드의 힘>>(1995)이 국내에 소개된 이후로 대중 음악 관련 서적들이 더딘 행보로나마 꾸준히 발간되고 있지만 막상 일반인들이 접하기에 적합한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듯 전문적인 이론서가 먼저 발간되고 입문용 책이 뒤늦게 소개되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순서가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미권에서도 대중 음악 연구 일반을 폭넓게 다룬 책들은 최근에야 서서히 발간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은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어떤 분야의 연구 영역이 전문화되고 그 성과가 축적되어 그것들을 서로 일관되게 조율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려면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중 음악 연구의 주요 논점과 문제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단행본으로는 로이 셔커의 <<대중 음악의 이해Understanding Popular Music>>와 키스 니거스의 <<대중 음악 이론Popular Music in Theory>>가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여기에 최근 들어 기획력을 갖춘 출판사가 중심이 되어 유명 학자들의 논문을 모아둔 형식의 편저가 속속 발간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을 포함하여 데이비드 헤스몬덜프(David Hesmondhalgh)와 키스 니거스가 편집을 맡은 <<대중 음악 연구Popular Music Studies>>, 브루스 호너(Bruce Horner)와 토마스 스위스(Thomas Swiss)가 기획한 <<대중 음악과 문화의 주요 용어Key Terms in Popular Music and Culture>>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책의 구성과 주제를 다루는 방식, 서술의 관점이 포괄적이면서 명료하여 일반인들을 가장 배려한 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을 잠깐 보자. 1부는 밖에서 본 대중 음악으로 그 토대를 이루고 있는 조건들(테크놀로지, 산업, 소비)을 검토한다. 이것들은 평소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대중 음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의 해당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중 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이런 조건들이 바로 대중 음악을 현재의 모습으로 이끌었으며 우리가 여기에 정서적으로 매료되는 요인이라는 점이 1부의 공통된 전제다.

2부는 안에서 본 대중 음악으로 그 체계를 구성하는 장르와 스타일(팝, 록, 소울, 댄스, 월드 뮤직)을 다룬다. 글의 구성은 장르의 역사를 따라가기도 하고 문제를 중심으로 삼기도 하는데, 대중 음악의 전체적인 장에서 개별 장르가 어떤 차별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일부를 구성하는지, 그리고 장르에 따라 제작과 소비의 패턴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초점을 둔다.

3부는 다시 밖에서 본 대중 음악이다. 여기서는 대중 음악의 논의에서 핵심적으로 부각되는 논쟁들(해석, 성차, 정치, 인종, 로컬리티)이 주제가 된다. 대중 음악은 기본적으로 차이를 바탕에 두고 갈등과 대립과 경쟁이 펼쳐지는 장이다. 이런 갈등은 대중 음악과 비 대중 음악처럼 내부와 외부 간에 벌어지기도 하고, 음악가와 청중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하며, 음악의 용도와 의미를 두고 펼쳐지기도 한다. 대중 음악이 현대의 문화적 산물 가운데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긴밀한 구성과 일관된 관점이 이 책이 일차적인 미덕이지만, 한편으로 이 책은 대중 음악 연구의 현 수준과 깊이를 보여주는 이론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총출동하여 (줄잡아) 지난 30년 간 대중 음악 연구에서 축적되어 온 이론적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주장이나 포크와 록의 저항 담론에서 보듯 대중 음악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초기에는 섣부른 단정이나 무모한 일반화가 많았지만, 상이한 관심과 이론적 배경을 가진 많은 학자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면서 주장들이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좀더 정교한 논리가 개발되었다. 이와 더불어 초기의 지배적 담론에서 소외되었던 영역이 복권되어 역사 서술이 바로잡히고, 새로운 현상이 가져오는 장점과 단점을 두루 검토하는 균형 감각이 길러지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학문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팝과 댄스 음악을 적극 조명하는 것이 이채롭다. 팝 분야에서는 감상적인 발라드와 (소홀하기 쉬운) 동요, 찬송가를 재평가하고, 댄스 음악의 경우 하위 문화에 편중되었던 기존의 서술에서 벗어나 댄스홀의 역사를 통해 20세기에 춤과 음악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살펴본다. 한편 록의 진정성의 뿌리를 찾기 위해 포크를 넘어 19세기의 낭만주의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간 록의 등장의 급진성을 부각시키려는 노력 때문에 희생되었던 중간 시기를 복권하려 한 시도도 주목할 대목이다. 흑인 음악의 서술에서 허슬러 라임과 같은 구어적 전통을 배려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지만 책에 담긴 논의의 무게는 그동안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연구 분야에서 확인된다. 가장 대량으로 제작된 음악이 가장 사적으로 소비되는 아이러니를 팝의 존재론적 본질로 설명하는 대목이나 록의 모순을 ‘하위 지배’ 문화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것, 그리고 “백인이 블루스를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표현되는 인종에 관한 고정 관념을 기능주의 관점으로 돌파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더불어 글로벌화와 디지털 경제의 문제, 그리고 해석적 전략 면에서 결정론적 사고를 경계하며 빛과 그늘, 양방향을 모두 바라보려는 신중함이 돋보인다. 한편 최근 대중 음악 연구의 참신한 패러다임으로 각광받고 있는 민족지학의 방법론을 통해 인디 록의 관습과 성차 문제를 조율하는 문제를 살피고, 카리브해 지역 슈퍼스타들의 초국가적 실제를 들여다보는 장도 무척 흥미롭다. 아울러 음악학의 최근 화두인 신체에 관한 담론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최근 들어 대중 음악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새로운 장르는 눈에 띄지 않지만 전체적인 지형에서는 여전히 변화의 흐름들이 존재한다. 롤링 스톤스 같은 과거의 록 스타들에서 보듯 이제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공연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공연의 명분을 위해 앨범을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아동이 음악 소비 주체로 급부상하여 관련 시장이 성장하는 중이며, 영미권 중심의 음악 헤게모니가 위축되면서 전 세계 음악 중심지가 새롭게 재편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중고음반 시장과 디지털 음원 거래 등 눈에 잡히지 않는 음악 경제의 규모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새로운 하위 문화가 생성되는 대신 펑크와 고스, 로커빌리 같은 과거의 하위문화가 다시 현재로 불려와 안정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모습들이 포괄적인 이슈와 연계되어 논의로 흡수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이 책에는 스타 프로필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일종의 인물론으로 쓰여진 독특한 글들로 그 자체가 독립적인 텍스트이면서 본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마빈 게이와 흑인 음악, 봅 말리와 월드 뮤직, 아바와 유로팝 등). 스타가 대중 음악에서 가장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고, 스타를 통해 대중 음악의 역사와 논점을 집약적으로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스타 프로필은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압축해서 정리하는 축약본이자 안내자 역할을 한다. 본문의 내용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프로필을 먼저 읽으며 친숙해진 뒤에 본문에 도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울러 서문 뒷부분에 수록된 팝과 록의 연대기를 참고하며 대표적인 노래와 앨범을 찬찬히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책에 달린 주는 모두 번역자가 작업한 것이다. 처음에는 소박한 정도로 출발했지만 편집자와 원고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분량이 상당히 늘어났다. 언어를 넘나드는 번역은 늘 끈기와 집중력을 요구하는 법이지만 저자가 여러 명인 책은 특히 까다롭다. 글을 쓰는 스타일과 전개 방식, 표현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9장은 아마 독자들에게도 가장 부담스러운 장이겠지만 번역을 하는 입장에서도 만만치 않은 경험이었다. 이것은 팝의 해석이라는 분야 자체가 까다로운 이유도 있고, 구체적인 예 없이 이론들의 흐름을 훑어보는 전개 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저자 특유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팝의 해석과 관련된 부문은 대중 음악 연구에서 비교적 늦게 시작된 분야이지만 최근에 가장 활발한 성과를 내놓고 있는 분야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이 훗날 개정판을 낸다면 테크놀로지에 관한 장과 더불어 가장 많은 개정이 필요한 장일 것이다.

끝으로 내게 멋진 책을 발견하게 해준 운과 이렇게 원고를 최종적인 책으로 정성껏 옮겨준 한나래 출판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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