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년이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으로 분주한 해라면 2005년 국내 음악계는 말러와 바그너의 해였다. 몇 년 전부터 지속된 말러의 열풍이 변함없이 인기를 이어갔고, <니벨룽의 반지> 초연으로 바그네리안들을 설레게 만든 해였다. 이런 현상은 출판에도 반영되어 말러와 바그너에 관한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김문경이 쓴 <구스타프 말러 2: 황금시대>는 지난해의 1권에 이어 말러의 전성기인 빈 시절을 다루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를 재구성한 전기와 악곡을 분석한 부분으로 나뉘며, 감상자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주기 위한 책이다. 한편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은 말러와 함께했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말러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두 위대한 예술가의 교감을 엿볼 수 있는 내밀한 전기이다. 이렇듯 분석적인 책과 내밀한 책은 상호보완적인 방향에서 말러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진입장벽이 있어서 <구스타프 말러 2>는 말러의 음악에 대한 상당한 이해(그것도 분석적인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읽어내기가 어려우며, 발터의 전기는 책이 씌어진 정황과 시대 맥락을 고려하고 읽어야 한다. 말러의 세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책은 아직도 소개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어디선가 말러의 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바그너에 관한 책은 양적으로 더 풍부한데 주목할 책은 버나드 쇼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와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가 쓴 <트리스탄 코드>이다. 바그너는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필가들, 사상가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중 버나드 쇼는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는 영국 대중들에게 바그너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 씌어진 해설서로 당시 바그너가 어떤 식으로 이해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트리스탄 코드>는 음악이 아니라 사상적인 측면에서 바그너에 접근한다. 청년 독일단 시절에서 시작하여 쇼펜하우어를 거쳐 니체에 이르는 그의 사상적 여정을 그의 예술관의 변화와 관련하여 추적하고 있다. 비록 바그너의 음악에 관해 세세한 지침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 바그너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제시함으로써 음악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바그너는 누구보다도 이런 책이 필요한 작곡가이다.






출판 시장에서 점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분야가 평전인데 예술가의 전기도 예외가 아니라서 괜찮은 전기들이 몇 권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반가운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글렌 굴드와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를 다룬 책이다. 정신과 의사인 피터 F. 오스왈드가 쓴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은 굴드의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자료와 해석을 곁들여 평전 본연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이 책의 미덕은 굴드에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과 음악 애호가들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점이다. 반면 <리흐테르>는 예술가 다큐멘터리 작가로 유명한 브뤼노 몽생종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회고록으로 내밀한 성격의 책이다. 수도승의 이미지로 알려진 리흐테르를 좀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면서 동시에 구성 자체가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책이기도 하다. 2부의 음악수첩은 두고두고 참고할 만한 훌륭한 자료이다.
성악가는 육성을 매개로 하는 음악가라서 청중들에게 좀더 친근한 이미지로 기억되고 스타 시스템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성악가들은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스타로서도 유혹적이다. 위대한 성악가이자 '불꽃처럼 화려한 삶'을 영위한 마리아 칼라스의 생애를 다룬 앤 에드워드의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 애호가들보다는 스타들의 굴곡진 삶에 관심 있는 자들에게 더 매혹적인 평전이다. 칼라스의 평전이 극적인 드라마로 다가온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바리톤으로 성공한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자서전 <빅맨 빅보이스>는 잔잔한 드라마에 가깝다.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로서 온갖 편견들을 극복하고 세계 무대 정상에 오른 이야기는 다소 진부한 면이 있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감상적이지는 않다. 담담하게 위트를 섞어가며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이 책은 화려한 성악가로서의 삶 이면의 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편안한 에세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전기는 조금 특별하다. 음악가 대신 악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악기가 스트라디바리우스 현악기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 명기들은 그 어떤 음악가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토비 페이버의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다섯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첼로가 주인공이고, 볼프 본드라체크의 <첼로 마라>는 '마라'라는 이름의 첼로가 주인공이다. 대단히 비슷한 성격의 책들인데 논픽션 구성을 취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현악기 명기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들과 역사적 사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면, <첼로 마라>는 악기를 1인칭 화자로 내세운 연극적인 구성을 취한다. 음악에서 악기가 갖는 위상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들로 캐주얼하게 읽을 수 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 서적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발간되었지만 잡지에 실린 글을 재활용하거나 외국의 자료를 적당히 참고해서 쓴 책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국내 필자들이 음악 단행본 집필에 서서히 뛰어드는 추세가 보이며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은 풍월당 주인 박종호이다. <유럽음악축제 순례기>는 음악 여행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책을 내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충분한 자료와 내용이 준비된 가운데 쓴 책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책 곳곳에 필자의 애정(종종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이 넘친다. <유럽음악축제 순례기>가 유럽 음악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의 필독서라면 <불멸의 오페라>는 오페라 애호가들의 필수 지침서이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방대한 분량에서 보듯 오페라를 실질적으로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수록하고 있다. 항목별로 찾아볼 수 있어서 단행본이라기보다는 사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책머리에서 필자가 쓴 것처럼 오페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쉽지만 다른 책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몇 년 전 <무지카 프라티카>라는 책이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채넌의 <음악 녹음의 역사>는 레코딩이라는 매체가 20세기 음악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하는 책이다. 지금은 레코딩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된 1995년만 하더라도 레코딩 매체에 주목한 저술은 흔치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음악 문헌에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는 선구적인 저술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초의 디지털 환경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오가며 레코딩의 역사와 그것이 갖는 문화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이 책은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훌륭한 저술이다.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소리의 자본주의>가 레코딩 매체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토머스 포리스트 켈리의 <음악의 첫날밤>은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작품이 초연되던 상황을 재구성한 흥미로운 저술이다. 사실 음악에서 초연이라는 것은 미술의 원본과 같은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 전혀 아니지만 당시 음악이 작곡되고 연주되고 감상되던 상황으로 돌아감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음악 행위가 어떤 역사성과 의미가 있는지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음악의 의미를 절대시하고 해석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논의거리를 제공하는 책이며, 과거의 음악을 좀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해준다. 학술적인 측면과 대중성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두 권의 책은 개인적으로 음악 단행본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책은 대중음악 서적들이다. 클래식 서적도 음악 출판물에서 변두리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대중음악 서적의 처지에 비하면 호사스럽다. 국내에서 대중음악 서적의 자리는 '대중'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할 정도로 열악하다. 그럼에도 2005년에는 의미 있는 책들이 몇 권 소개되어 궁핍한 자리를 채워주었다.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이 집필한 <한국 팝의 고고학 1960>과 <한국 팝의 고고학 1970>은 국내에서 발간된 대중음악 연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술로 손색이 없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필자들의 정성과 노고가 전달되는 책인데, 그것은 대중음악이 문화적인 인식이 없던 분야라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차적인 자료를 찾아내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고작 3,40년 전 역사를 다루면서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한국 팝'이라는 말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국내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미8군 부대에서 시작하여 음악 감상실과 그룹 사운드 전성기를 지나 대마초 파동과 신촌의 언더그라운드에서 마감된다. 일관된 관점을 따라 역사를 정리하기보다는 시대를 복원해내는 일에 일차적인 중점을 두고 있으며, 수많은 사진과 인터뷰 자료의 가치만으로도 빛나는 책이다.
사이먼 프리스, 윌 스트로, 존 스트리트가 편집을 맡은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는 대중음악을 단순히 듣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이해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 기본 밑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책이다. 대중음악 연구는 다양한 분야가 만나서 교류하는 학제간 연구의 대표적인 예로서, 이 책은 팝과 록의 중요한 개념들, 대표적인 장르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교양과목 수준에서 집필하고 있는 책이다. 통시적 접근과 공시적 접근을 두루 취하는 이 책은 대중음악의 시대적 변화는 물론 우리 시대에 대중음악이 왜 중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좀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내가 쓴 후기를 참고하라.)
평전 시장의 확대는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몇 권의 전기들이 나왔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책은 예일 대학의 교수 존 스웨드가 쓴 <마일즈 데이비스, 거친 영혼의 속삭임>이다. 예전에 그의 자서전이 국내에 소개된 적도 있지만, 이 책은 평전이 갖춰야 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책이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예술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의 호흡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가장 창조적이며 복잡한 인물의 심성을 꼼꼼하게 펼쳐 보인다. 이 정도의 깊이를 보여주는 평전을 매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외에도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마이라 프리드만이 쓴 <제니스 조플린> 평전이 소개되었다. 사실 이 두 권의 책은 아쉬움이 조금 든다. 밥 딜런의 자서전은 미국에서 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책이지만, 이미 그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왔고 대중들이 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이 같은 책이 적절한 독자층을 만나기가 어렵다. 제니스 조플린도 마찬가지다. 마이라 프리드만의 평전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생을 충실히 복원하는 데 머물고 있을 뿐 조플린이라는 인물에 대해 기본적인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의 욕구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비단 이 두 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초적인 자료조차 거의 소개되지 않은 국내에 절실히 요청되는 책은 아티스트의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라 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처럼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집필한 책이다. 어쨌든 2005년은 평전에서 비틀즈와 존 레논의 강박에서 벗어난 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위안하고 싶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아직 소개되어야 할 뮤지션과 밴드가 무궁무진하게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