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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용중,이현숙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평소에 접하기 쉽지 않은 러시아의 과학 소설이라는 정보에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과 이 책을 두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우리들>을 선택했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선례를 남겼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검증된' 작품이기도 하고, 또 소비에트 체제에 비판적인 소설을 간만에 접하는 즐거움도 맛볼 겸해서다. 그런데 아무래도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작가의 문체였다. 간결한 문장과 단어가 마치 기계 부품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성, 생략과 비약, 스피디함과 꼼꼼함을 오가는 상황 묘사와 전개, 전편을 휘감는 섬뜩하면서 차가운 분위기는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열린책들의 악명 높은 오탈자와 만나니 계속적으로 독서가 방해를 받는다. 분명 어려운 소설은 아닌데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이후 이렇게 몰입이 안 되는 소설은 처음이다.
또 하나, 이런 식의 디스토피아 소설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포맷이라는 점도 있다.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고발, 그리고 이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소설은 <우리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멋진 신세계>와 <1984>에서 이미 교과서적인 지위를 얻었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와 달리 통제된 사회에 대한 공포를 '은유적으로' 넌지시 드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소설이 계속적으로 힘을 갖는 한 이유인 것 같다.) 보다 넓게 보자면, 이제 사회의 모든 세세한 면면들이 통제되고 억압되는 거시적 전체주의보다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전체주의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초판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만났더라면 좀더 내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너무 늦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