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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 영혼의 음악
양한수 지음 / 아침이슬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세상에는 수많은 음악이 있고, 음악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음악책이 있다. 음악에 따라 책의 구성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클래식 가이드는 위대한 작곡가와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단일한 서사를 따라가는 교양의 장이며, 재즈 이야기는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끌려온 흑인들의 애환으로 시작한다. 록은 인종 융합과 사회 참여의 장을 중심으로 기술되며, 여기서 나온 저항의 이데올로기는 힙합에 이르러 더욱 심화된다. 한편 월드뮤직 산책은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의 발걸음을 닮았다. 뉴에이지는 번잡함을 피하고 휴식을 위해 시골과 자연을 찾는 도시인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뉴에이지 영혼의 음악>도 제목에서 보듯 이런 관점과 그리 멀지 않다. 책은 음악 해설서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 뮤지션과 음반 중심의 실용적(편의적) 구성에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확하지 않은 문법과 어휘 구사, 감정적인 형용사와 주관적인 감상의 나열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초적인 정보를 원하는 독자에게 꽤 유용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사실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슨 음반을 사고 무슨 곡을 들을지 알려주는 것 정도니까.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뉴에이지 음악에 대해 '사운드적으로는 수동적인 음악이고, 사상적으로는 히피 이후 기독교와 다른 영적 가치를 모색하는 흐름' 정도의 이해밖에 없는 내가 굳이 이 책을 선택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책의 강점은 뉴에이지 음악을 현대 음악의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파악하여 포괄적으로 규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과 웨스트코스트 재즈에서 뉴에이지의 맹아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이 책의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나는 지금 저자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정보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책에는 사실의 왜곡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바그너를 줄기차게 후기 낭만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바그너는 브람스보다 스무 살이나 많다.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저자의 서술(1899년)과 달리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에 열렸고, 여기서 드뷔시가 영감을 얻어 쓴 곡은 <바다>가 아니라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다. 이런 사소한 오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나가면서 툭툭 던지는 말이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 비엔나 악파가 구체적인 주변 소음과 자연음을 탐구한 과정에서 새로운 음렬 기법이 나왔고, 이것이 훗날 샘플링 기법의 전범이 된다는 주장(p.73)은 처음 듣는 소리다. 바그너와의 대조를 부각시키기 위해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를 특권층의 전유물로 몰아붙이는 논리(p.273)도 기이하긴 마찬가지다. 대중 음악과 관련된 정보에서도 왜곡은 계속된다. 전혀 다른 장르인 punk와 funk를 붙여놓고 마치 동의어처럼 제시하거나, 별개의 지역에서 별개로 발전한 하우스와 테크노를 인과관계로 설정하거나, 크라프트베르크가 힙합의 흐름을 이었다고 우긴다(실상은 정반대이다). 하지만 가장 압권은 히스패닉에 대한 각주 설명이다. "중남미 제국에서 정치정세의 불안과 빈곤으로 인하여 자기 나라를 빠져나와 미국에 밀입국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사람들을 '카리비언 블랙' 또는 '히스패닉'이라 부른다." 나는 혹시라도 이런 치명적이고 악의적인 왜곡이 확대 재생산될까 두렵다.
이런 오류들은 저자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다. 그래서 뉴에이지 음악과 관련된 정보들도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 열정과 부지런함은 분명 미덕이지만 그것만으로 글쓰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의 기본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