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르부르의 저주 - 귀족 탐정 다아시 경 1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6
랜달 개릿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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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마술을 소재로 한 색다른 추리물'이라는 평을 보고 나처럼 미스터리와 판타지와 SF가 절묘한 비율로 결합된 작품이라고 지레짐작한다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추리 소설의 그릇에 마술과 과학적 원리가 가미된 이 작품의 실상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외연을 넓혀줄 흥미로운 지적 자극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가 만족스러운 작품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에 아쉬움이 많다. 무엇보다 셜록 홈즈의 그림자를 떨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아이디어와 구성의 잠재력을 좀더 밀고 나갔어도 좋았을 텐데 장르 컨벤션에 안주했다는 느낌이 들고, 또 캐릭터의 매력이 미진한 것도 불만이다. 이래저래 이어지는 시리즈물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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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이성형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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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대해 잘 모를수록 그에 대해 무관심한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신비의 이미지도 더해가는 법입니다. 내게 라틴아메리카도 그런 대상 중 하나입니다. 지리적으로도 더할 수 없이 멀고 심정적으로도 나의 인식의 지도에 아주 작은 지분을 가질 뿐이지만, 그렇기에 또 가장 가보고 싶은 대륙이기도 합니다. 아마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면 이 책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인식의 눈을 뜨게 해줄 훌륭한 길잡이라는 사실에 다들 동의할 겁니다.

미지의 나라를 접근하는 데 기행문만큼 적절한 형식도 없습니다. 역사서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책처럼 일정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또 여행가이드처럼 실질적인 정보만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즉 적당히 실용적이면서 깊이 있는 서술도 가능하며 문학적 멋도 살릴 수 있는 형식인데, 이 책은 이런 장점들을 무난하게 살리고 있습니다. 쿠바와 칠레를 다룬 장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고 페루와 멕시코 장은 옛 문명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어느 장이든 한 이슈에 치우치는 법이 없습니다. 각국의 문화와 음악과 음식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전해주어 과거와 현재의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합니다. 낯선 고유명사들도 비교적 부담감 없이 처리하고 있고, 무엇보다 정성들인 삽화와 초점 있는 서술이 독서를 지루하지 않게 만듭니다.

무릇 성공적인 기행문은 지금의 삶을 돌아보고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듭니다. 특히 천의 자연 환경을 가진 길쭉한 나라 칠레가 유난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다양하다는 말이 이렇게 소중하게 들린 적도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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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동물원
츠츠이 야스다카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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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기시다 슈라는 일본의 심리학자의 책을 들고 마치 전도하는 심정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히 권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도착적인 심리와 성에 대해 독특한 이론을 펼치는 이 괴짜 학자는 꽤 오랫동안 나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면서, 온갖 세상의 무질서와 욕망의 충동성을 고차 방정식 풀 듯 말끔하게 정리해 나를 매혹시켰다. 츠츠이 야스다카의 <인간 동물원>을 읽으면서 문득 기시다 슈가 생각났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 둘의 세계관이 꼭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성에 관한 심리를 독특한 필치로 풍자하면서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기시다 슈의 또 다른 자아가 심리학에 근거한 SF를 쓴다면 아마 이런 모습을 띠지 않을까 싶다.

주로 인간의(그것도 남성의) 성적 욕망을 풍자하는 짧은 글들을 수록한 이 단편집은 무엇보다 즐겁다. 그리고 단편 특유의 독특한 아이디어들이 살아 있으면서 일관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곁가지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매스 미디어와 관료제가 지배하는 현 일본 사회를 희화화하고 있는데, 가끔은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공격적인 독설보다는 이런 경박한 풍자가 더 매력적일 때도 있는 법이다. 이 단편집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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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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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뒤늦게 읽으면서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이것은 독서를 흥미롭게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당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특히 주인공들의 과거사가 회상으로 처리되는 소설의 전반부가 그렇다). 그것은 두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큐브릭의 영화가 공포 그 자체의 '효과'에 집중하는 반면, 원작인 소설은 공포의 '원인'에 관심이 많다. 어떻게 하여 평범할 수도 있는(?) 주인공들이 그와 같은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소설의 줄기다. 따라서 사실상 호텔이 주인공인 영화와 달리, 킹의 소설은 세 인물들에게 골고루 지면을 할애하여 이들의 정신 분석을 실행한다.

최고의 공포는 항상 가장 친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스티븐 킹이 강조하는 바이다. <샤이닝>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의 근원지는 바로 가정이다. 평온하게 보이는 삶의 위태로운 지반을 폭로하면서, 가정 폭력, 알코올 중독, 믿음 상실 같은 현대 미국 사회와 가정의 문제들을 고발한다. 더불어 오버룩 리조트 호텔의 흥미진진한 역사를 다루면서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하고, 창작의 문제로 고심하는 대목에서는 스티븐 킹 개인의 고민을 슬쩍 내비친다.

비록 시각적인 매체의 장점을 한껏 살린 큐브릭의 영화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소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소설 <샤이닝>은 누구든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광기, 분노, 증오 같은 '인간 속 괴물'을 흉측하면서도 소름끼치게 형상화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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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다섯 번째 번역서입니다. 아래는 아마존 주소입니다.
http://www.amazon.com/exec/obidos/ASIN/0192853821/qid=1097840593/sr=2-1/ref=pd_ka_b_2_1/104-4184829-6048733

저자가 서문에서 책의 범위를 규정했듯이 본서는 "음악에 관한 것이면서 음악에 관한 사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음악의 정보보다는 포괄적인 음악의 이해를, 음악의 역사보다는 음악의 개념과 해석의 역사를 다루며, 작곡과 레퍼토리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연주와 담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음악이 제공하는 음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넘어 음악적 경험과 그 의미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책이다.

오늘날 음악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이 책이 갖는 의의는 더욱 특별하다. 20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음반점이 하나둘씩은 있었으며, 이 곳은 음반을 사고 파는 상점을 넘어 음악에 관한 정보와 대화가 교환되는 문화적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음악은 책과 더불어 당당히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오디오 기기는 모든 가정의 거의 필수적인 가구였다. 이제 영화가 이끄는 영상 시대가 도래하면서 음악은 슬그머니 우리의 삶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음악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낸다. 음악은 어느덧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와 함께 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음악에 관한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음악이 일종의 소비재 내지 배경막이 되었을 때, 음악의 의미는 어떻게 될까? 레코딩으로 인해 온갖 음악이 무차별적으로 소비될 때, 기존에 음악을 갈라놓았던 관습과 전통의 장벽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에서도 음악(주로 클래식 음악)은 예전의 순수함과 숭고함을 간직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음악은 정말로 순수했던 것일까? 과거의 음악들이 현재의 음악보다 우대 받는 상황은 정상적인 것일까? 음악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니콜라스 쿡 교수는 이런 질문들로 우리를 인도하는 최적의 안내자다. 그것은 그가 비단 전통적인 음악학뿐만 아니라 미학, 민족음악학, 심리학, 사회학, 대중 음악 연구 등 음악과 관련된 학과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어서 오늘날 음악, 나아가 음악 담론의 상황을 가장 공정하고 비판적으로 보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쿡 역시 전통적인 음악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음악 분석에서 출발했지만, 일차적으로는 분석이 음악의 이해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1987년에 나온 <음악분석입문 A Guide to Music Analysis>은 바로 이런 고민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어 1990년 그는 <음악, 상상력, 그리고 문화 Music, Imagination, and Culture>라는 문제작을 내놓았는데, 이 책은 음악학적 경험과 음악적 경험을 구별하여 악보 중심의 구조적 청취가 일반적인 음악 청취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통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을 통해 그가 역설했던 점은 들리는 것이 음악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 음악의 의미와 해석은 해당 문화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니콜라스 쿡은 관심 분야를 분석에서 미학 쪽으로 옮기면서 주로 연주와 해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음악 담론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작곡가 편향이라는 점이다. 그는 작곡가의 독재에서 벗어나 연주와 해석을 적극 수용하여 음악의 이해에 균형을 맞추고자 했고, 작품과 연주 사이의 어딘가에서 음악의 존재론을 정립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대중 음악과 민족음악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중 음악이야말로 연주에 큰 의미를 두는 음악이며, 또 단일 저자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음악의 의미를 순수한 음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멀티미디어로 확장하려는 야심 찬 시도를 한다. 1998년에 나온 <음악적 멀티미디어 분석 Analysing Musical Multimedia>이 바로 그런 시도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뮤직 비디오나 영화 음악, 광고 등 멀티미디어에 관한 담론들이 음악의 의미를 철저히 시각적 정보에 종속시켰다면, 이 책은 음악이 중심이 되어 의미를 생성하고 폭을 넓혀 가는 과정을 이론화하고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경합(contest)을 지향하는 멀티미디어 미학이 자율성의 윤리와 작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한다고 믿는다.


본서 <음악이란 무엇인가>(원제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Music)는 이런 그의 이력이 총망라된 책이다. 비록 분량은 짧지만 가볍지 않은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일은 불필요해 보이며, 다만 이 책과 관련하여 음악학의 지형도를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1980년대에 베이비붐 세대가 음악학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의미 있는 변화들이 일어났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민족음악학과 음악학의 소통, 대중 음악 연구의 등장, 아도르노 르네상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모두를 연결하는 키워드는 음악 '안'에서 음악 '밖'으로 눈을 돌리자는 것으로, 쿡의 표현을 따르자면 '음악학을 골방에서 끌어내기'라고 할 수 있다. 본서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그동안 민족음악학은 모든 음악을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연구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주류의 음악학자들에 의해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오인되었다. 그런데 이런 민족음악학의 방법론이 이 시기에 주류와 소통하면서 클래식 음악 연구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흐름에 대중 음악 연구가 가세했다. 기존의 대중 음악 연구는 거의 사회학과 문화 연구가 독점한 분야였는데, 영국의 학술 저널 이 창간된 이후로 음악학이 대중 음악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학은 더 이상 협소한 악보의 틀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고, 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도르노가 선구자의 위치로 떠올랐다. 본서의 6장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새로운 음악학'은 바로 이런 흐름과 나란히 한다.

니콜라스 쿡은 이런 흐름에 직접 몸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발 떨어진 위치에서 이 같은 시도들에 지지를 보낸다. 주목할 점은 한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인데, 그는 음악의 순수성과 악보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연주를 중시하는 점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나치게 음악 외적인 맥락에 치중하는 것--다시 말해 문화가 음악의 모든 의미를 규정한다는 식의 주장--을 경계한다. 한마디로 음악 안과 음악 밖,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 균형을 잡으면서 새로운 흐름과 구별되는 위치를 다지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음악의 자율성이 타자를 이해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결론 부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니콜라스 쿡과 음악학의 새로운 흐름의 미묘한 차이점을 여기서 더 설명하기보다는 책 한 권을 추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국내에 소개된 크리스토퍼 스몰의 <뮤지킹 음악하기>(조선우, 최유준 번역, 효형출판)로 이 책은 위의 새로운 흐름과 관련된 저술 가운데 국내에 번역된 거의 유일한 책이다. 스몰이 이 책에서 음악의 의미를 규정하는 방식과 니콜라스의 본서가 음악의 의미에 접근하는 방식을 서로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아울러 이제는 새로운 음악학의 스타가 된 수잔 매클러리와 로렌스 크레이머를 비롯하여, 아도르노와 더불어 1980년대 음악학의 방법론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자크 아탈리, 대중 음악 연구의 이정표를 제시한 리처드 미들턴, 그리고 무엇보다 조제프 커만의 저술도 하루빨리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언제나 학술 서적 출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동문선에는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대학 출판부들이 제몫만 했어도 동문선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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