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스내처 - 이색작가총서 1
잭 피니 지음, 강수백 옮김 / 너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스포일러를 알아버린 스릴러 영화를 보는 기분이 이럴까. 이 역사적인 고전 SF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신체 내부에 침투한 강탈자 외계인이라는 아이디어가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탓도 있겠다. 그렇다고 꼭 시대적인 이유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점잖은 말투의 대화는 긴박한 상황을 헤쳐가기 위한 절박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제3자에게 정황을 찬찬히 설명하는 투에 가까운데, 의도적이 아니라면 단정하고 깔끔하고 안정감 있는 문체가 여기서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미지의 공포를 전하기 위해 러브크래프트가 구사했던 문체와 비교해 보라.)

이 소설을 좀더 흥미롭게 읽는 방법은 외계인의 존재를 소설의 초반부에 언급되었듯이 전적인 심리적 망상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익숙하던 것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여전히 섬뜩함을 자아내며, 그것이 집단 최면이나 인종주의와 결부된다면 사회 비판적 텍스트로도 힘을 발휘한다. (중소도시의 따분한 일상에 대한 언술로 보기에는 주인공의 사회 생활이 너무 건전하다.) 한편 외계인의 본성이 의외로 평화적임이 드러나면서 자발적으로 지구를 떠나는 설정은 전염병으로 상황 종료를 맞는 <우주 전쟁>처럼 맥빠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생존을 위해 그토록 먼 우주를 건너온 생명이 보이는 삶의 의지가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 - 인간은 어떻게 유아화되었는가
클라이브 브롬홀 지음,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이렇게 흥미진진한 책이 왜 여태 화제가 되지 못했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처음 책을 잡는 순간부터 거대한 비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화생물학자는 마치 추리 소설에 나오는 범죄 현장의 탐정과 같다. 주어진 것은 한정된 단서와 현재 상황뿐, 상상력을 가동하여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재구성해야 한다.

이 책에서 풀어야 할 질문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점이다. 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으며, 그럼에도 어떻게 하여 세상의 주인이 되었을까? 저자는 그 비밀의 열쇠를 유아화에서 찾는다. 인간의 외양이 침팬지 새끼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인원에 비해 성장 속도가 늦은 것으로 인간의 독특한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 원인과 결과의 설명은 말끔하다. 의식의 탄생과 성적 일탈들을 설명하는 대목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으며, 남녀와 인종의 차이를 유아화의 정도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 또한 참신하다.

자연과학이 커다란 틀을 만들고 나면 이제 디테일을 채우는 것은 인문과학의 몫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기본적인 조건이 설명되면, 개인별 사회별 차이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흥미로운 일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말미에 굳이 인간을 몇몇 유형으로 나누어 영양가 없는 분석을 하기보다 차후의 문제들을 제시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다. 유아화가 계속 진행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비단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것은 동성애 문제만이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고 자녀 양육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풍조도 있는데 이것은 유아화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아들에게서 보이는 무분별한 폭력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자살이라는 문제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쟁은 유아화에 저항하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유아화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인가? 등등.

아무튼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별함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책임에 분명하다. 특히 영화 <나쁜 교육>에서 가톨릭 신부와 동성애의 관계가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또 <M. 버터플라이>에서 대체 남자를 여자로 오인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구심이 들었던 사람이라면 필히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소설가들은 독특한 인물을 창조하고, 어떤 소설가들은 독특한 문체를 만든다. 그런데 가끔은 아예 세계 자체를 창조하는 소설가들이 있다. 커트 보네거트는 누구보다 세계의 창조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개성적인 필력을 자랑하는 소설가이다.

<제5도살장>과 더불어 1960년대 보네거트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고양이 요람>은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그다운' 작품이다. 이 말은 그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낯설고 황당하고 어지럽고 상징적인 세계에 어지럼증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나 또한 예전에 새와물고기 판을 읽고 당혹해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 보네거트를 접하는 사람은 <갈라파고스>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 책과 <타이탄의 미녀>는 절대 피하라! 영영 보네거트와 멀어질 수가 있다.)

보네거트가 창조한 세상은 어리석은 인물이 지배하는 엉망진창인 세상이다. 이 책에 나오는 펠릭스 호니커 박사처럼 도덕적인 책임감 없는 사람에게 세계의 운명을 맡겨놓은 꼴이다. 그리고 평범한 일반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이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 위해 그는 독특한 구성을 선보인다. 단순한 플롯에 또 다른 플롯을 잘게 나눠 덧붙이는데, <고양이 요람>에는 허구의 바이블과 엉터리 시, 생소한 개념용어, 산 로렌초의 방언이 등장한다. 보네거트만의 거리두기 전략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고양이 요람>은 핵에 대한 공포를 블랙유머로 뒤집은 소설이다. 과학, 종교, 정부, 진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조롱이 이보다 더 신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이 단순한 빈정거림에 그치지 않는 것은 그에게서 진심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외견상 가벼운 필체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슬픈 연민이 있다. 어쩌면 그의 독특한 세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로마 - 냄새의 문화사
콘스탄스 클라센 외 지음, 김진옥 옮김 / 현실문화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아로마 - 냄새의 문화사>는 감각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다. 냄새에 관한 책이 드문 사정도 있겠지만, 이 책은 쉽고 분명한 어조로 후각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다. 서양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감각이 된 후각을 주제로 한 책이라면 대충 그 구성이 짐작된다. 1부는 아직 서양에서 후각이 명망을 누리던 옛 시대를 다룬다. 2부는 비서구 사회에서 후각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3부는 현대 서양에서 후각이 갖는 정치적 의미와 상업화 과정을 다룬다. 각각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이 주요 방법론이지만, 철학적, 심리학적 차원도 논의되고 있다.

전체적인 논지의 방향이 분명하므로 관건은 얼마나 풍부한 사례를 수집하여 독자를 설득시키는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대목은 2부이다. 시각 중심이 아닌 후각 중심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어떤 부족은 계절마다 식물들이 내뿜는 향기에 따라 달력을 만들고, 몸에 칠한 진흙의 무늬로 체취를 조직하여 영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냄새를 통해 성이 결정된다고 믿고, 꿈을 낮 동안 방출된 냄새의 수집 과정으로 이해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는 방식이 문화권에 따라 상이함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이렇게 냄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우리가 갖가지 악기 음색이 어우러진 음악을 듣듯 다채로운 냄새의 교향악을 즐길지도 모른다. 3부에서 아로마테라피와 향수 산업과 관련하여 냄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논의도 무척 흥미롭다. 후각의 존재 양태의 특이함을 반영하는 동시에, 후각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인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모든 클래식
박준용 지음 / 마고북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이 교양의 대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래서 초보자들을 위한 안내서가 꾸준히 발간되고 있으며,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처음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어떤 유명 작곡가들이 있으며, 무슨 음반을 사고, 어디서 공연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클래식>은 바로 작곡가와 연주회장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레퍼런스로 기획된 책이다.

1부는 작곡가 중심의 서양 음악사를 개괄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유명 작곡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공공 지식으로 널려 있어서, 저자의 균형적인 시각과 논점이 없다면 백과사전식 나열이 될 위험이 있다. 이 책의 1부는 불행히도 산만하다. 저자 나름대로 서양 음악사를 소화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20세기 현대 음악을 다룰 때 나타난다. 현대 음악은 이 책처럼 나라별로 작곡가에 접근했을 때 도저히 그 맥락과 상황을 짚어낼 수가 없다. 찰스 아이브스, 마이클 티펫, 카를 오르프 같은 핵심적인 몇몇 이름들이 보이지 않고, 1970년대 이후 새로운 경향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나 레코딩처럼 현대 클래식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들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고전, 낭만주의 서술에도 문제가 많다. 일단 잘못된 정보들이 종종 눈에 띈다. 베토벤의 <열정>을 초기 작품이라 한다거나 멘델스존이 <한여름 밤의 꿈>을 19세에 작곡했다고 하는 등(서곡만 그렇다) 비교적 사소한 오류도 있지만, 하이든, 슈베르트, 슈만에 대한 과소평가가 더 큰 문제다. 진위가 의심스러운 작곡가의 에피소드를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 점도 걸리고, '들어서 좋으면 좋다'는 식의 딜레탕트 입장도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에 비하면 세계 음악 도시들의 연주회장과 연주 단체를 소개하고 있는 2부는 가치가 크다. 이런 식으로 세계 각국을 돌며 도시를 대표하는 음악 공연장과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는 책이 드물뿐더러, 적절한 역사와 에피소드를 통해 여러 나라의 독특한 음악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세세한 도시들까지 모두 커버하려는 욕심이 앞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페스티벌과 오케스트라의 경중을 좀더 가려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그렇다고 든든한 기초 자료로서의 의미를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

2부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종교 음악과 관련하여 유명한 오르간을 보유하고 있는 여러 교회와 성당들이다. 오르간은 교회 건축의 일부이기 때문에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직접 해당 장소를 찾아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곳이 갖는 공연장으로서의 의미는 남다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오르간 건축에 관한 자료를 보충하여 2부만을 독립적인 책으로 낸다면 훨씬 괜찮은 모양새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