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파시 능력자의 추락과 비상, 고통과 황홀경의 이야기

내가 로버트 실버버그와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플레이보이 SF 걸작선>>에 수록된 <지아니>라는 단편을 통해서였다. 그 전에도 그의 이름을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적은 있었지만 그는 내게 수많은 SF 작가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첫 학기 수업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데 우리말로 된 소설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가족들에게 소포로 책을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수록된 많은 단편들 가운데 실버버그의 글은 단연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8세기 초의 클래식 작곡가 페르골레지가 현대에 환생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이 작품은 당시 대중음악을 공부하면서 클래식과 팝 음악의 가치 체계의 충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의 구미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실버버그의 단편이 이런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실버버그라는 작가에게 이어졌다. 가까운 서점에 들러 그의 책을 둘러봤는데, 실버버그의 대표작으로 소개된 책들 가운데 금방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다잉 인사이드>>(1972)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과 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나는 셀리그라는 소심한 초능력자의 개성에 매료되었고, 실버버그의 능수능란한 화술에 빠져들었다. 훗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틈틈이 영국 각지를 돌아다닐 때 늘 이 책을 들고 다녔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공연을 보러 글래스고에 갈 때는 셀리그와 토니의 애시드 여행 이야기를 읽었고, 웨일스에서 열리는 슈퍼 퍼리 애니멀스의 공연을 보러 가는 길에는 셀리그의 동굴을 슬쩍 훔쳐봤다. 그렇게 나의 영국 생활과 하나가 된 실버버그의 이 책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지자 나는 번역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의 간절한 소망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까지의 이야기는 통속적이고 평범한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로버트 실버버그를 소개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그가 엄청나게 많은 책을 낸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SF 소설만도 100권이 넘으며 논픽션과 그가 편집한 선집도 60권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뉴욕 브루클린 출생으로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스물한 살 때 휴고상에서 ‘가장 유망한 신인 작가’ 부문을 수상하여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다. <어메이징 스토리스>, <판타스틱>, <사이언스 픽션 어드벤처> 같은 SF 잡지에 수많은 필명을 써가며 주로 청소년 대상의 글을 기고해온 그는 SF 작가 랜들 개릿과 공동 집필을 하기도 했고, 1960년대에는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 소설과 역사 논픽션이라는 상이한 분야에도 손을 댔다.

실버버그가 본격적으로 SF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이다. 그는 우주비행사와 소녀의 로맨스에 뱀파이어 이야기를 접목시킨 <<가시Thorns>>(1967)에 이어 정치범들을 시간 여행으로 감금시킨다는 내용의 <<혹스빌 스테이션Hawksbill Station>>(1968)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후 휴고상 수상작인 동명의 중편을 개작한 <<나이트윙Nightwings>>(1969), 두 지성체의 이질적인 문화를 통해 인류학적, 종교적 주제를 탐색한 <<지구로의 하강Downward to the Earth>>(1970), 인격이 금지된 행성에 관한 이야기인 네뷸러상 수상작 <<변화의 시간A Time of Changes>>(1971),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밀집된 인구들이 살아가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인 <<월드 인사이드The World Inside>>(1971), 애리조나 사막으로 영생을 찾아 떠나는 네 명의 젊은이의 이야기인 <<두개골의 서The Book of Skulls>>(1972), 그리고 이 책 <<다잉 인사이드>>까지 걸작을 연달아 쏟아내며 실버버그는 그 어떤 SF 작가보다도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실버버그는 <<발렌타인 경의 성Lord Valentine's Castle>>(1980), <<발렌타인 대신관Valentine Pontifex>>(1983) 같은 판타지 연작 소설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논픽션적 관심사였던 고대 역사를 소재로 한 <<길가메시 왕Gilgamesh the King>>(1984), 네뷸러상 수상작을 표제로 내세운 중편 모음집 <<비잔티움을 향한 항해Sailing to Byzantium>>(1985) 등으로 꾸준한 필력을 과시했다. 그 밖에도 그는 아내인 캐런 헤이버와 함께 편집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훌륭한 선집들을 내놓았으며, 1967-1968년에 미국 SF작가 협회의 회장을 맡았고, 1970년 세계 SF컨벤션의 주빈으로 초청된 바 있다.

로버트 실버버그는 미국에서 SF 문학의 황금기를 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지만, 정작 그의 대표작인 <<다잉 인사이드>>는 SF 소설의 장르적인 특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텔레파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가까운 미래라는 점을 제외하면 <<다잉 인사이드>>는 현대인의 불안정한 심리와 소통의 문제를 다룬 본격문학(이 말이 거슬린다면 장르문학에 반대되는 그 무엇)에 가깝다. 1935년 뉴욕에서 출생한 유대인이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설정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의 이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소외감과 불안을 나타내기 위해 데이비드 셀리그를 내세워 가상의 자서전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인공이 펼치는 모험의 재미에 빠져드는 방법이 있고, 주인공에 일체감을 느껴 그의 감정과 갈등에 공감하는 방법도 있으며, 소설 배후에 드러난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를 간파하는 것, 혹은 순전히 작가가 글을 풀어가는 솜씨에 매료되는 것도 소설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내가 <<다잉 인사이드>>에 끌린 것은 셀리그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신기한 능력을 타고난 그는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젊은 시절을 소진한 뒤, 그 능력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야 능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제까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왔고 세상과의 소통의 끈이 되어주었던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하자 심한 존재론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다. 만약 그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대체 나는 누굴까? 그 능력이 없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

<<다잉 인사이드>>는 성장에 관한 은유다.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세계를 깨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모든 사람은 성장에 대해 불안과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는 평생 미성숙의 상태로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남들보다 일찍 삶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셀리그는 뒤늦게 성장의 고통을 겪는 자다. 평생을 세상과 적대적인 관계로 살아오다가 마흔 살에 가까워서야 세상과 화해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여동생과의 해묵은 갈등을 풀고 헤어진 옛 연인과도 상상으로나마 화해한다. 그런 점에서 <<다잉 인사이드>>를 <<호밀밭의 파수꾼>>(1951)의 어덜트 버전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이 책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서 텔레파시 능력은 젊음이 갖는 무소불위의 힘을 나타낸다. 본문에서도 셀리그와 주디스가 나누는 대화에서 그 능력을 성적 은유로 해석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대학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셀리그는 유난히 젊음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어느덧 자신의 세대가 사회 지배층으로 편입되었음을 발견하고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점차 왜소해지는 자신을 깨닫는 셀리그의 모습은 바로 필멸의 존재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또한 어쩌면 그것은 일찍이 SF계의 촉망받는 천재로 등장하여 온갖 명성을 누려온 실버버그 본인의 환멸과 불안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다잉 인사이드>>를 한 개인에 한정된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은 현대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에 있다. 셀리그가 일생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키티와 토니를 만난 해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키티와 로맨스가 있었던 1963년은 셀리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구 사회를 급습한 엔트로피의 혼돈과 철학적 절망의 긴 가을이 오기 전 희망과 활기로 넘쳤던 마지막 여름”이었고, 토니를 만난 1968년은 “모든 세상이 조각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닫게 된 바로 그 해”였다. 1963년에서 1968년까지는 미국 현대사에서 혼란스러운 격동의 시기였다. 청년들과 흑인들과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힘차게 외친 대항문화의 시대였고, 베트남 전쟁과 암살과 마약과 히피와 로큰롤의 시대였으며, 미소 간의 우주 개발 경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대였다. 셀리그는 기성세대와 사회의 속물근성에 환멸을 느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무분별함에도 냉소를 보내는 사람이고, 소수 민족에 대한 편견도 솔직하게 드러낸 사람이다. 이와 같은 환멸과 냉소와 편견이 그를 더욱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개인과 사회의 합일점을 절묘하게 통합한 로버트 실버버그의 절정에 오른 글 솜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쓰며 다져진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은 여기서 반짝반짝 빛을 낸다. 현재와 과거, 1인칭 서술과 3인칭 서술(때로는 2인칭 서술까지), 주관적 고백과 객관적 설명을 오가며 진행되는 문장은 셀리그의 분열적인 심리 상태에 걸맞게 능청스럽게 이죽거리다가 의기소침하게 냉소적으로 돌변한다. 작가는 셀리그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기 위해 딱딱한 논문 형식과 문학 작품의 인용, 자기 고백적 산문체를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얻어진 셀리그의 심리 묘사는 놀라우리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다. 이런 실버버그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19장이다. 셀리그의 가장 개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은 인칭과 존칭을 달리하며 순간적인 심정의 변화를 절묘하게 통제하여, 작가가 바로 옆에서 셀리그의 삶을 그대로 중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신경하게 툭툭 던지는 실버버그의 즉흥적인 필치와 단순한 문장의 매력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대목이다.

텔레파시와 같은 초감각 능력은 SF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이템이다. 본문에서도 흥미롭게 언급된 바 있는 베레스퍼드의 <<햄프덴셔 경이>>(1911)와 스테이플던의 <<이상한 존>>(1935)을 비롯하여 국내에 번역 소개된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1953)와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1953), 그리고 온갖 초인들이 등장하는 코믹스와 심지어 <왓 위민 원트> 같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텔레파시 능력은 우리들을 매혹시키는 상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잉 인사이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우디 앨런의 영화 <젤리그>(1983)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연상 작용은 주인공의 이름이 우연히 비슷하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일단 연상 작용이 가동되고 나니 비슷한 점들이 발견된다. 누군가의 옆에 다가가면 그 사람의 신체를 닮아버리는 ‘인간 카멜레온’ 젤리그 역시 셀리그와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물론 쉽게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 속에, 익명성 속에 숨어버리는 젤리그와 달리 셀리그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세상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며 소외로 고통 받는 인물이다. 어쩌면 셀리그(젤리그가 아니라)야말로 우디 앨런적인 인물에 더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디 앨런과 로버트 실버버그가 모두 뉴욕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점, 그래서 <젤리그>와 <<다잉 인사이드>>가 거의 대부분 뉴욕을 무대로 전개된다는 점 또한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이제까지 국내에 소개된 실버버그의 작품으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중편을 장편으로 확장시킨 소설과 몇 편의 단편이 있을 뿐, 그가 남긴 1970년대 걸작들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미국의 현대 SF 작가들 가운데 가장 다재다능한 실버버그의 진가가 이 책을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진다면 번역자로서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기회를 내게 열어준 책세상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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