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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글을 읽을 때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양면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즉, 독자는 이 작가가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미처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기를 바라지만, 내심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달리 말하면, 독자는 자신이 읽는 책을 통해 작가가 자신에 비해 더 나은 세계를 꿈꾸거나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세계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글이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행위이며, 이 행위에는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글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어 있다는 것도 말해준다.
물론, 독서가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들이 책을 읽는 데 있어 분명하게 의식되는 것도 아니며, 항상 의식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독자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무의식에 가깝게 갖고 있으며, 더 많이는 그러한 의식(혹은 무의식) 없이 소모적인 독서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책을 읽는 일은 타인과의 소통 혹은 자기 정체성 확인의 의미를 띠고 있는 셈이다.
김영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대략 95년쯤인 것 같다. 데뷔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읽은 것은 다른 단편들을 몇 편 읽은 후였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그의 단편을 한두 편 읽은 뒤였는데도 그 작품은 썩 괜찮았다. 괜찮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새로운 감각을 실험하는 소설들에 식상해 있던 내게 상당히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인상적인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몇몇 단편들, 이를테면 '도마뱀', '호출', '흡혈귀' 등과 장편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등을 통해 그만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소설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해왔다.
이번에 읽은 <포스트잇>은 김영하의 첫 산문집으로, 그는 그간 소설을 통해 신선한 구성과 소재를 선보여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에서도 소설에서 보여준 것 못지않은 재치와 끼를 발산하고 있다. 특히, 표제의 장에 수록된 짧은 단상들은 특유의 촌철살인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고 있는데, 그밖의 장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도 군더더기 없이 독특한 발상과 내밀한 고백을 넘나들며 ‘김영하 표’ 매력을 전달한다.
여러 편의 글이 좋았지만, 지면상 두 편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게임'으로 나날이 더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과 문학의 특성을 대비시키고 있다. 게임의 룰이 인생의 그것과 달리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게임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한 후 그는 문학은 시뮬레이션에 대한 안티로서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얼핏 생뚱맞을 것 같은 대비인데도 꽤 인상적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은 '해찰과 두통'으로 영국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돈 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수업시간에 떠들고 잠자고 다른 학생 두들겨 패는 등 ‘사보타주’를 벌이게 되며, 이 같은 사보타주들이 교육 제도를 서서히 흔들고 종내는 변화시킨다는 연구를 인용하며, “개기고 피하고 도망가고 드러눕는데도 세상은 변”하는 것인가라고 물음을 던진다.
위에서 책을 읽는 일은 타인과의 소통 혹은 자기 정체성 확인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썼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어느 쪽이었냐면, 헬렌 메릴의 “Don't Explain”을 좋아하는 김영하, 김수영의 '거미'를 통해 시적 에피파니를 처음 느낀 김영하, “평범”하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김영하... 등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