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egas, "Rehearsal", 187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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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5-07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에서 진짜 주인공은 리허설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녀들이 아니라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일 것이다. 그 빛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바닥과 벽, 심지어는 백색 발레복까지도 엷은 미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덕분에 빛 속에 이뤄지는 어린 소녀들의 군무는 미숙한 만큼이나 풋풋하고 싱그러운 생명의 몸짓이다.

예전같으면 봄볕이 따가워 눈을 자주 찌푸릴 만도 하건만, 오늘 낮에는 직장 후배가 "햇빛 때문에 눈이 따가워요, 손으로 챙을 만들어도 그러네"라는 말에 같이 챙을 만들어보고는 "왜, 따갑지는 않은데.."라고 했다. 올 봄에 나는 봄볕이 좋은가 보다..

꼬마요정 2004-06-1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군요..
저는 그냥 발레하는 소녀들만 봤는데..역시!
이거 퍼갈게요~^^

로렌초의시종 2004-06-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즈 님의 해석에도 관심이 많이 가네요. 저도 5월의 매력은 푸른 하늘과 환하지만 따갑지 않은 햇빛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퍼갈께요~

브리즈 2004-06-15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가의 그림을 좋아하시는 꼬마요정 님, 로렌초의 시종 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
변변찮은 두어 줄 멘트를 좋다고 하시니 민망한 마음입니다. 아무튼 두 분의 방문을 받고 보니 갑자기 그림들이 보고 싶어지는군요. 인터넷이 아닌 갤러리에서요..
 

 


E. Degas, "Miss Lola, au Cirque Fernando", 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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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편향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혼신의 힘을 모둔 결단의 말들과 함께 오랫동안 신중하게 주저하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비명과 탄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배어나오는 말들이나 그것들을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말이 거칠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한 정신이 비범한 평정 상태에 이르러 그 지경을 모방하여 얻어낸 유려한 말들에 나는 종종 귀를 기울였지만, 그보다는 그 상태를 증명해주는 다급한 말들의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장난치는 말들, 판을 깨는 말들도 좋아했다. 하던 일을 진중하게 계속하는 사람은 늘 찬양을 받아야 하지만 때로는 손에 쥔 것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기약 없는 땅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용기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 말들은 어김없이 순결하다.

  - 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  "책머리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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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1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땀내가 나는 말들, 참 말이라는 게 공허한 것 같아요. 말이 없는 세상을 아주 가끔은 꿈꾸기도 해요. 그냥 말이라는 게 점점 거칠어지고, 생략되고, 왜곡되는 기분이에요. 요즘 <검은 소설이 보내다>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말에 대한 탐구 같은 게 느껴지는 책인데 잘 읽혀지지는 않아요. 그냥 세상이 다 말장난 같기도 하고, 말 속에 철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땀내가 나는 말의 의미, 어떤 것일까. 진실이 담긴 말이라고 해서 모두 땀내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오래 간직해 온 말이 땀내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브리즈 2004-06-1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동안은 침묵 속에서 말을 생각하게 되잖아요. ^^..
저는 가끔 생각해요.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활자 중독자다라고.. 여행을 갈 때도 몇 페이지 안 읽을 거면서 책을 들고 가고, 책이 없으면 하다못해 신문이나 잡지라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땀내가 나는 말들이 있다면, 진실이 담겨 있고, 생활에 뿌리박은 말들이겠죠, 아마도.. 오래 간직해온 말들..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견딜 수 없네 - 황금이삭 1
정현종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지난해 11월 언젠가 정현종의 새 시집 <견딜 수 없네>가 나온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일간지 문화면에 여러 차례 소개된 시집의 내용이나 시인의 근황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새 시집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시집을 읽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미 꽤 오랜 동안 시집을 읽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새 시집을 읽을 만큼 겨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새로운 시인을 알고자 하는 욕구도 이전에 알던 시인의 새 시집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도 거의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정현종의 새 시집 <견딜 수 없네>를 구입했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작에 읽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이번 시집은 마음에 여러 가지 울림을 전해줬다. 그것은 아직도 정현종 시인이 당대의 중요한 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시적 발언과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시적 성취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은 그 울림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견딜 수 없네>를 지배하는 정서는 거칠게 말해, 연민과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몇 년 전까지 시인은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을 통해 혼탁한 세계 속에서도 살아남은 작은 생명의 숨결들을 건져내며 죽음의 세계를 껴안았었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은 여전히 이전 시집에서 보여준 세계를 지속하면서도, 나날이 비인간화되고 단절화되는 세상 속에서 벼랑 끝까지 몰리고 있는 삶의 몰락을 연민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으로 통찰한다.

'권력이나 돈이 걸린 싸움이 너무 상스럽고 맹목적이면 / 그 탐욕의 난경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된다. / 국가든 정부든 정당이든 무슨 기관이든 개인이든 / 그 탐욕과 맹목은 / 사회 전체를 거지 같은 난경에 처하게 한다. / 난경에도 종류와 질(質)이 있다. / 오늘날 이 나라의 난경은 거지 같지 않은가.' '난경'이라는 시의 부분이다. 또 다른 시를 보자. '이 세상은 / 나쁜 사람들이 지배하게 되어 있다. / (그야 불문가지) / '좋은' 사람들은 '지배'하고 싶어하지 않고 / '지배'할 줄 모르며 그리하여 / '지배'하지 않으니까. / 따라서 '지배자'나 '지배행위'가 있는 한 이 세상의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운명'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분노이다. 시인의 낮게 가라앉은 분노는 시적 여과를 거치고 있음에도 상당히 '날것'의 냄새가 난다. 우리네 삶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있는 세상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참담한 심경이 이렇듯 '날것'의 냄새를 풍기면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분노하는 동시에 연민의 시선도 보여준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 지껄이는 모든 말들 / 지껄이는 입들은 / 한결 견딜 만하리' '말하지 않은 슬픔이...'라는 시의 전문인데, 시인의 분노가 연민과 만나 '난경'의 세상을 '견디는 힘'을 가리키고 있다.

시인이 가리키는 견디는 힘은 연민에서 오고, 그 연민은 자연과 생명이 보여주는 작은 이치와 아름다움에서 다시 자양분을 얻는다. 시인 특유의 생명 의식이 있기에 분노를 다스리는 연민을 갖고 자연과 생명이 보여주는 작은 이치와 아름다움을 기릴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그래요. /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전문)

이미 몇 해 전에 환갑을 넘긴 시인은 세월이 흐를수록 유연해지고 유연해져서는 이제는 '비스듬히' 세상을 받치는 시를 쓰고 있다. 누가 있어 비스듬히 세상을 받칠 수 있을까. 정현종 시인이 있어 잠시, 비스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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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0-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모르지만, 이 글도 추천.
시를 안 읽은지 너무 오래돼서 ^^;; 얼마전에 제 홈에서 가을 이벤트로 시화전을 열었어요. 친구들이 시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 좋아하는 시 한편씩 올려놓으면 다른 친구들이 누구의 시인지 맞춰보고, (시인 이름 맞출 능력이 없는) 저는 어울릴법한 그림들을 찾아 올려놓는 거였는데요. 가을 이벤트 치고는 참 빤하고 얄팍하다 싶었는데, 뜻밖에도 친구들이 너무 좋은 시들을 선물해줘서 이 가을 아주 시가 넘쳐나고 있답니다. :)

브리즈 2004-10-2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 님, 제 서재에서 이런저런 글을 읽고, 코멘트도 남겨주시고.. 고맙습니다.
시가 넘쳐나고 있다는 딸기 님 서재에 놀러 가볼까요? ^^..

딸기 2004-10-2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아니고 홈에서요. ^^;;

브리즈 2004-10-28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코멘트를 올리고 보니 오타더라구요. 그냥 뒀답니다. ^^..
 
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글을 읽을 때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양면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즉, 독자는 이 작가가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미처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기를 바라지만, 내심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달리 말하면, 독자는 자신이 읽는 책을 통해 작가가 자신에 비해 더 나은 세계를 꿈꾸거나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세계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글이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행위이며, 이 행위에는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글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어 있다는 것도 말해준다.

물론, 독서가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들이 책을 읽는 데 있어 분명하게 의식되는 것도 아니며, 항상 의식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독자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무의식에 가깝게 갖고 있으며, 더 많이는 그러한 의식(혹은 무의식) 없이 소모적인 독서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책을 읽는 일은 타인과의 소통 혹은 자기 정체성 확인의 의미를 띠고 있는 셈이다.

김영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대략 95년쯤인 것 같다. 데뷔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읽은 것은 다른 단편들을 몇 편 읽은 후였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그의 단편을 한두 편 읽은 뒤였는데도 그 작품은 썩 괜찮았다. 괜찮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새로운 감각을 실험하는 소설들에 식상해 있던 내게 상당히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인상적인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몇몇 단편들, 이를테면 '도마뱀', '호출', '흡혈귀' 등과 장편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등을 통해 그만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소설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해왔다.

이번에 읽은 <포스트잇>은 김영하의 첫 산문집으로, 그는 그간 소설을 통해 신선한 구성과 소재를 선보여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에서도 소설에서 보여준 것 못지않은 재치와 끼를 발산하고 있다. 특히, 표제의 장에 수록된 짧은 단상들은 특유의 촌철살인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고 있는데, 그밖의 장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도 군더더기 없이 독특한 발상과 내밀한 고백을 넘나들며 ‘김영하 표’ 매력을 전달한다.

여러 편의 글이 좋았지만, 지면상 두 편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게임'으로 나날이 더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과 문학의 특성을 대비시키고 있다. 게임의 룰이 인생의 그것과 달리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게임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한 후 그는 문학은 시뮬레이션에 대한 안티로서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얼핏 생뚱맞을 것 같은 대비인데도 꽤 인상적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은 '해찰과 두통'으로 영국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돈 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수업시간에 떠들고 잠자고 다른 학생 두들겨 패는 등 ‘사보타주’를 벌이게 되며, 이 같은 사보타주들이 교육 제도를 서서히 흔들고 종내는 변화시킨다는 연구를 인용하며, “개기고 피하고 도망가고 드러눕는데도 세상은 변”하는 것인가라고 물음을 던진다.

위에서 책을 읽는 일은 타인과의 소통 혹은 자기 정체성 확인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썼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어느 쪽이었냐면, 헬렌 메릴의 “Don't Explain”을 좋아하는 김영하, 김수영의 '거미'를 통해 시적 에피파니를 처음 느낀 김영하, “평범”하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김영하... 등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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