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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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여자처럼 혀를 조금만 내밀고 꼬리 부분을 핥았다. 입안에서 차가운 액체로 녹아내리면서 무슨 그림같이 열린 창가에 나부끼는 작은 꽃이 프린트된 포플린 커튼이며, 창 너머로 불어들어오는 아카시아꽃의 향내며, 잉잉거리며 유리창을 오르내리는 꿀벌의 나른한 날갯짓 소리며, 하는 것들이 지나갔다. 거기 덧붙여서 옛날 전쟁 터지고 피란시절에 장사 나간 어머니가 머리맡에 두고 가던 미제 젤리의 맛이 지나갔다.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초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검정색 젤리의 그 이국적이고 독특한 향내. 그건 무슨 풀로 향기를 냈을까. 나는 이것이 무엇인 줄 잘 알면서도,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제는 다 그쪽으로 간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20쪽

오래 전에 불경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정이 맺혔던 부분들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대요.-39쪽

누렇게 퇴색한 옛날 사진의 인물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른스럽고 무슨 현자처럼 은근한 권위가 있어 보이는 걸까.-83쪽

그러나 사람세상의 이 미완은 멋있지 않니? 미처 해내기 전에 같은 무렵에 살던 모두가 죽어버리니까. 불교에서 그걸 뭐라고 하더라. 백년 후에는 현재 세상에 살고 있던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댄다. 그맘때 사람들은 모두가 새사람들이지. 그렇게 거듭된단다.-147쪽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열에 달았던 땅이 식으면서 신선한 흙냄새가 올라오고 시원한 바람이 일면서 맛잇는 대기가 코 안에 가득 차지요.-228쪽

그 비가 밤새껏 오던 날, 내가 당신의 머리를 잘라주던 생각이 나셔요? 당신의 웃통을 벗기고 무릎 앞이랑 궁둥이 밑에다 신문지 깔아놓고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주고 갑갑할 테니까 손에 거울을 들려줬지요. 나 예전에 친구들하구 서로 커트를 해주던 솜씨가 있어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쓰던 양면 면도날 하나만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쥐면 되었으니까. 한손을 빗처럼 벌려 당신의 머리카락을 물듯이 잡고선 면도날로 살살 그어내려가면 가지런하게 잘렸죠. 그런데 가위로 자르면 단면이 싹둑 잘리니까 그렇지 않은데 면도날로 잘라서 그런지 머리카락 끝이 불빛에 반사되는 거예요.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반짝거리는 거예요.
음, 솜씨가 괜찮은데.
하면서 거울을 들고 머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당신이 말했어요.
그런데 이건 뭐야. 반짝반짝하는 게......
면도날로 자르면 그래요. 보기 좋잖아. 머리에 별이 내려앉은 거 같애.-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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