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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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공사현장을 지나다보면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 위에 발자국이 찍혀있거나 구석에 소심하게 싸인이 돼있는 걸 본다. 철이 든 후엔 그러지 않지만, 어릴 적엔 나도 그런 소행을 만만찮게 저지르곤 했는데, 그건 아마도 시멘트가 굳어버리면 그  장소를 갈아엎지 않는 이상 발자국이나 싸인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게다. 나의 소심한 존재를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욕구.

춘희가 만든 벽돌엔 그녀가 싸인 대신 그려넣은 개망초꽃과 시 한 수가 있다. 벙어리(후엔 병아리)인 그녀를 '붉은 벽돌의 여왕'이 되게 해 준 증거. 그리고 죽을 만큼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알리고 싶었던 욕구의 발현.

 

천명관은 알려진 대로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어째 밑줄 그을 틈도 주지 않고 술술 읽혀내려가게 하는 재주가 용하다 못해 기이하다. 대단하다. 간만에 대단한 작가를 발견해서 기쁘다. 그리고 그가 이미 죽은 작가가 아니라 한창 젊은 나이의 작가인지라,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작품을 남겨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자뭇 흥분까지 된다.

내일 오전까지 마감해야 할 일이 있는데다가 이번 주에 할 일이 태산 같이 쌓여 있어 일 분 일 초도 아까웠는데, 이 책을 집어든 순간, 완독하는 것만이 최대 목표였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기다렸다가 읽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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