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 -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백암 / 1993년 10월
절판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리차트 브로티간의 작품 어딘가에 씌어 있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흡족스럽다.
-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19쪽

나는 류 아처를 주인공으로 하는 로스 맥도날드의 일련의 작품들을 몽땅, 꼬리 끄뎅기까지 좋아한다. 로스 맥도날드의 소설이 지니는 미덕은 그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소심함과 성실함 속에 있다. 물론 결점도 그 안에 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다 뭉뚱그려서, 나는 로스 맥도날드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이다.
- 마이 네임 이즈 아처 --24쪽

"이 부근에 있는 개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얘기예요. 이 드넓은 숲 어딘가에 수정으로 된 작고 동그란 연못이 있어서 말이죠, 그 수면이 마치 거울처럼 매끈매끈하거든요. 그리고 거기에는 늘 저녁 노을이 비추어져 있다는 얘기예요.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늘 저녁 노을이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글쎄요." 라고 말하고 개는 어깨를 으쓱했다.
"수정이란 아마도 기묘하게 시간을 빨아들이는 모양이죠. 정체 모를 심해어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아주 위험하겠지?"
"예, 그 광경을 본 사람은 모두 거기에 빠져들고 싶어진대요. 아무튼 정말 너무 너무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라서. 그리고 한 번 거기에 빠져든 사람은 영원히 그 저녁 노을의 세계 속을 헤매 돌아다니게 되죠."
"별로 나쁘지는 않잖아."
- 거울 속의 저녁 노을 --28쪽

SNEAK은 '살금살금 걷다'란 뜻이다. 과연 스니커를 신으면 살금살금 걸을 수 있다. 스니커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틀림없이 친구들이나 가족들로부터 신나게 불평을 들었을 것이다. '누, 누구야! 너야.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니까 깜짝 놀랬잖아'라든가, '당신, 이제 그 새 신발 그만 신었으면 좋겠는데요. 나, 섬뜩해서 접시를 벌써 세 개나 깨고 말았다구요; 라든가 하고.
- 마이 스니커 스토리 --40쪽

낮 시간에 아오야마 거리를 거닐고 있으면, 그렇고 그런 인간들과 곧잘 마주치곤 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는 유난히도 자주 맞닥뜨렸다.
"안자이 씨, 뭐 하고 계세요?"
"아, 아, 뭐, 딱히, 잠깐 좀 말이지."
하는 식이다. 안자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한가한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바쁘기 짝이 없는데도 그것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 그 경계를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 메밀국수집의 맥주 - -75쪽

삼십 년에 한 번밖에 우승을 하지 않는 팀을 응원하고 있노라면, 딱 한 번의 우승으로라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듯 십 년 정도는 즐길 수 있다.
- 삼십 년에 한 번 - -77쪽

설령 메뉴에 비프 커틀릿이 들어 있지 않다 해도, 열차의 식당칸은 꽤 멋지다. 뭐랄까, 옛날 식당 같은 고아한 분위기가 좋다. 먹기 시작하기 전과 다 먹은 후에 서로 다른 장소에 있다는 것도 느낌이 신선하다. 그리고 덜커덩덜커덩하는 그 흔들림도 기분이 좋다.
- 식당칸과 맥주 --146쪽

모르는 거리의 모르는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묘하게 전신으로 파고 들어온다. 이것은 아마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본질적으로는 서글픔을 동반하기 때문이라서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 여행지에서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하여 --148쪽

신주쿠에 있는 술집 중에 아주 맛있는 두부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누군가 나를 그곳에 데려갔을 때, 나는 너무 너무 맛있는 나머지 네 모를 연달아 먹어 치웠다. 간장이나 양념, 그런 것을 전혀 뿌리지 않고, 그냥 새하얗고 매끌한 것을 날름 먹어 치우는 것이다. 정말 맛있는 두부라면 불필요한 양념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영어로 하면 simple as it must be가 될까. 그 두부는 나카노에 있는 손두부집에서 요리집용으로 만드는 두부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맛있는 두부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자동차 수출도 좋지만, 맛있는 두부의 생산을 격감시키는 국가 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두부에 관하여 (1) --161쪽

'두부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무얼까?' 하고 한가한 때에 생각해 본 일이 있다.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정사를 나눈 후에 먹는 것이다.
- 두부에 관하여 (4) - -166쪽

우리 집에 책이 너무 많아져서 며칠 전 책장을 새로 사들였다. 직업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책이란 점점 늘어나기 마련인 그런 것이다. 짜증이 나서 1/3 정도는 팔아 치우자고 아침부터 선별 작업에 착수했는데, 막상 처분을 하려고 하니 '이건 이미 절판된 책이고' '또 언제 읽을지도 모르니까' '팔아 봤자 싸구려인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전혀 숫자가 줄지 않는다.
- 책 이야기 (1)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의 탁월성에 대하여 --192쪽

특히 그리스에 있을 때가 그랬는데, 아침에 일어난다 → 밥을 먹는다 → 수영을 한다 → 밥을 먹는다 → 낮잠을 잔다 → 산책을 한다 → 술을 마신다 → 밥을 먹ˆf나 → 잔다, 이런 패턴을 매일 매일 반복하느라, 신문이 파고 들어올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그리스란 나라는 정말 굉장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 신문을 읽지 않음에 대하여 --208쪽

때때로 혼자서 토론을 하며 즐기곤 한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는 꼬리가 있는 편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테마를 가지고 꼬리 지지파 A와 꼬리 배척파 B를 차례차례 연기하면서. 그런 걸 해 보면 인간의 의견 혹은 사상 같은 것이 그 얼마나 불분명하고 임기응변적인가 하는 걸 알 수 있다.
- 설날은 즐거워 (2) --246쪽

하루키 : 그래요. 빚이란 아주 바람직한 것이죠.
미즈마루 : 열심히 일하게 되니까.
하루키 : 연대감 비슷한 게 생기니 말입니다.
- 남자한테 '이른 결혼'은 손해인가 이득인가 / 안자이 미즈마루에게 듣는다 - -259쪽

아무래도 카레라이스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독되는 음식인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여자한테 샤부샤부로 곤죽이 되도록 공세를 하는 야쿠자처럼, 고기를 먹지 않는 나는 어머니 덕분에 카레라이스 중독에 걸리고 말았다.
- 카레라이스 이야기 / 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무라카미 하루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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