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완연해졌다. 범바위 찔레덤불 틈에 옻나무 잎새가 불긋거렸고, 너럭바위에 올라앉아 모과와 땡감을 함께 씹으면 물대추 맛으로 감쳤다. 김장밭에 들어가 왜무를 뽑아 먹으면 배 맛이 나고, 논배미마다 메뚜기 잡던 아이들의 두렁콩 서리하는 연기가 뒷목 끝낸 모닥불 마당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160쪽
읽다가 접어놨던 기사는, 김모라는 16세 된 소년이, 서울과 성남시 사이에 있는 어느 길목에서 과도로 택시 운전사를 살해하고 피 묻은 돈 1천 8백 원을 빼앗아 달아났다가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형제 친척 고향 등을 모르며 일곱 살에 외톨이가 되어 10여 년을 서울의 처마 밑에서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는 그 소년은, 서울 인심이 너무 박정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시골로 가려고 했으며, 시골로 가기 전에 먹고 싶던 것이나 한번 먹어보고 가려고, 그 돈 마련을 위해 그런 짓을 했다는 거였다. 소년은 이어서 그토록 먹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쌀밥과 콜라와 포도였다고 대답한 모양이었다.-184쪽
돌은 천년을 값없이 내버려져 있다가도 문득 필요한 자에게 쓸모가 보이면서 비로소 석재라는 허울을 얻으며 가치가 주어진다.-193쪽
내 안질이 사랑에 알려지면 할아버지는 곧 옹점이를 불러세우고 누가 언제 어디에다 무슨 못을 어떻게 박았는지 알아오도록 했다. 일진을 보아 살 없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때없이 함부로 벽이나 기둥에 못을 박으면 반드시 약한 아이의 눈에 삼이 선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주장이어서, 안에서는 사실 여부는 둘째치고 우선 옹점이 시켜 아무도 못박은 사실이 없다고 발명부터 했다. -286쪽
"역시 자네가 예서 사니까 든든허구먼." "꾸부러진 나무가 선산 지킨다더니 내가 바루 그 짝이지."-29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