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교과서에서 제목만 달달 외우고, 읽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책들. 그냥 '단테는 신곡, 단테는 신곡, 단테는 신곡....' 몇 번 외우기만 해도 학창시절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학교 졸업한 지 1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많이 아쉬워졌다. 단테의 신곡 그렇게 외워댔으면서 한 번이라도 읽어보기는 했나. 하멜표류기는 재미있을까 재미없을까. 현산어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서 언젠가부터, 저자와 제목만 외워두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는 중인데 이게 재미가 꽤 쏠쏠하다. 맹물지식에 조금씩 설탕이 더해지는 느낌~  쪼아요.

피천득 책도 그래서 골랐다. 피천득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름 멋지네' 라는 생각 뿐이었고 교과서에 나오는 수필 하나만 읽었던 것 같고.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보물을 건진 듯. 그리스인 조르바 이후로, 닮고 싶은 사람 서열 5위 안에 들 사람이다.  아, 술 못 먹는 것 빼고.

술은 너무 좋은 거잖아요.

 

마음에 들었던 구절 몇 개.

-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수필)

- 어제 나는 외투를 벗어 버리고 거리에 나갔다가 감기가 들었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걸음걸이에 탄력이 오는 것을 느꼈다. 충분한 보상이다.    (조춘)

- 선물은 뇌물이나 구제품같이 목적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다. 구태여 목적을 찾는다면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선물)

-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 가나 아니 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눈물)

-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가 비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춘원)

- 앞을 바라보면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좋은 단풍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

- 하버드 대학에서는 롤링스라는 키츠 학자로 유명한 교수가 있었다. 스물다섯에 죽은 시인을 연구하느라고 70 평생 다 보내고 아직도 숨을 헐떡이면서 <엔디미온>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천재에 부닥치는 환희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반사적 광영)

- 술은 입으로 오고 /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 진리로 알 전부이다. / 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 / 그대 바라보고 한숨짓노라.............. 예이츠는 이런 노래를 불렀고, 바이런은 인생의 으뜸가는 것은 만취라고 하였다.    (술)

-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의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나무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이다.     (순례)

- 폐를 앓는 젊은 시인 키츠는 한밤중에 우짖는 나이팅게일 소리를 들으면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은풍유하리라 하였다.   (비원)

- 유명했던 자기 노래를 듣고 있는 가수. / 이제는 던지는 볼이 말을 안 듣는 유명한 투수, 관중은 조용히 보아 주었다. / 손님도 웨이터도 다들 돌아간 텅 빈 식당에서 혼자 커피잔을 들고 있는 주방장.    (여린 마음)

- 다섯 살쯤 된 여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비둘기들에게 과자를 부스러뜨려 주고 있습니다.  / 아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웃습니다. 미소는 인사입니다. 고운 초대이기도 합니다.   (초대)

- 결혼 생활은 작은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긴긴 대화다. 고답할 것도 없고 심오할 것도 없는 그런 이야기들.....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

- 오래오래 살면서 신문에서 가지가지의 신기하고 해괴한 일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송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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