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꽃 - 1992년 제1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양귀자 외 / 문학사상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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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영상은 한번 저장되었다고 해서 움직임을 멈추고 각인되어지지 않는다. 저장된 그 순간부터 기억은 저 혼자의 힘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영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25쪽

쓱싹쓱싹. 음산한 숫돌의 마찰음을 들으며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과 공포의 순간에도 사람들은 침을 삼킨다. 마치 기름진 음식을 상상하듯.-48쪽

그날도 안개가 심하다는 이장의 방송이 있었고, 마을 청년들은 모두 선착장으로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내 한쪽에서는 징이며 꽹과리를 동원해 두드릴 수 있는 한 힘껏 두들겨대는 길잡이 잔치가 벌어졌다.
거기다 돌아오지 않은 배의 가족들이 총출동하여 식구의 이름을 부르거나 문자로 기록해 낼 수 없는 괴성들을 질러대기 시작하면 좁은 선착장은 잠깐 사이에 용광로처럼 들끓기 마련이었다.
타오르는 횃불과 징, 꽹과리의 요란한 소리에 못지않게 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내지르는 육성 또한 안개를 뚫고 먼 바다까지 도달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안개 속에 길을 잃고 헤매는 배들은 어디선가 들려 오는 아내와 자식의 목소리만은 반드시 가려 듣게 돼 있다는 것이다.

(숨은 꽃-양귀자)-69쪽

"누군가, 내가 사람은 왜 죽기 전에 늙어야 할까, 넋두리를 했더니, 늙지 않는다면 억울해서 죽을 수 있겠느냐 그러더군. 우리의 생은 운명의 식탁이오. 운명이 차려 주는 것을 먹을밖에."-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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