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혼자 롯데시네마 영등포에 영화 보러 갔다가 차창밖으로 발견한 '폐업 도서대여점'.
아싸가오리! 혼자인 게 좋을 때는 바로 이런 때다.
저기 한 번 가자고 사정하지 않아도 (헌책방은 대부분의 경우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내 맘대로 갈 수 있다 이거야!
일단은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영화 먼저 보기로 하고 씨유레이러.

아. 전우치는 잘생겼구나. 2탄 3탄 계속계속 나와라.

그런데 영화가 끝나니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말았다.
벌써 문닫았으면 어쩌나 하고 미끄러운 눈길 위에서 전력구보했는데 다행히도 아직 닫지 않았다.
아주 심심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뭔가를 드시며 카운터를 지키고 계시고 손님은 오직 나뿐.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서가를 살피는데 도서대여점답게 만화책이 3분의 2 이상. 나머지는 가벼운 소설류다.
박완서 작가의 책 중 소장하지 않은 게 있어서 저걸 살까 하다가,
왠지 연말에 박완서는 축축 처지는 기분이라 일단 보류하고 다시 살핀다. 

그러다 발견한 게 배수아.
배수아 작가의 책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일요일 스끼야끼 식당>만 언제 한 번 읽어보려고 알라딘 위시리스트에 몇 년째 억류 중.
스끼야끼 읽기 전에 워밍업 하는 심정으로 읽어볼까 하고 2500원에 구입.



그리고 며칠이 지나 1월 1일 오후.
무얼 읽을까 책무더기를 뒤적이다 손끝에 집힌 게 바로 이 책.
마침 <푸앵카레가 묻고 페렐만이 답하다> 때문에 엄청나게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이번에는 정말 한숨에 훅 읽을 가벼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머고 읽기 시작했다.
1월 1일부터 훅훅 읽으면 올 한 해도 훅훅 바람같이 달려가겠지 하는 꿈보다 해몽 같은 생각도 잠시 했고.

그런데 몇 장 읽지 않아 깜짝 놀라버렸다.
바로 이 문장 때문. 

"하룻밤만 지나면 나는 서른세 살이 된다."

어쩌면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이!
그때부터 완전 감정이입하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주인공 유경은 잘난 것 하나 없는 서른 셋 독신녀에 가족들과는 자체적으로 연락 두절이고, 성격은 이중인격.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니어서 저녁엔 수의학 강의를 들으며 수의사 시험을 준비한다.
게다가 다행히 왕따도 아니어서 섹스 앤 더 시티처럼 독신녀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이들은 서로 먼저 결혼할까봐 전전긍긍 눈치보고 질투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같은 회사의 엘리트 상사이자 유부남인 길과 원나잇 스탠드를 하고
이걸 친구들한테 말해 말어 고민하다가 그 중 누구 하나는 결혼을 한다 하고
결국 길과 관계 갖기로 결정하고 셀러던트 주인공의 인생은 또 흘러가고...

2000년의 책이지만 10년 후에도 서른 셋 싱글여성의 인생은 변함이 없다.
여의도에서 커피 마시면서 미래 걱정, 남자 걱정.
홍대에서 커피 마시면서도 미래 걱정, 남자 걱정.
광화문에서 커피 마시면서도 미래 걱정, 남자 걱정....

결국 내가 이 책에서 얻어낸 것은 '위안'.
나 혼자만 안달복달하는 서른셋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되고 편안해진다.
그리고 든 2010년 나의 목표는,

올해엔 나도 좀 못돼지자.
지겨우면 지겹다고, 싫으면 싫다고 확실히 말하자.
뭐, 누가 뭐라고 하면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농이나 치면 그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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