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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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 버릇을 가지라, 신에 가까워지리라.-41쪽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선다. 한번 죽 훑어본다. 얼른 뽑아보고 싶은 책이 없다. 4백 권 남짓한 책들. 선집이나 총서, 사전류가 아니고 보면, 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 그때그때, 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 자연 그 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 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 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 그렇게 옮아간 그의 마음의 나그네길이, 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 한권 한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43쪽

선(禪) 같은 데서 비법을 주고받을 때, 스승이 뚱딴지 같은 물음을 불쑥 던지면, 뛰어난 제자가 마찬가지 헛소리 같은 사설로 받아넘겨서, 두 사람 사이에 홀아비 사정을 홀아비가 안 빙그레 웃음으로 마음이 마음을 알아, 깨달음의 주고받음이 이루어지는, 옛 우리네 마음놀이의 저 기합술 같은 수작의 생김새는 아마 이런 것이라 싶게, 태식의 한마디는 명준의 가슴에서 대뜸 울려오던, 그런 일이 있다. 그 후 그들은 툭하면,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 엉뚱한 데다 그 말을 쓰곤 했는데, 버스 꽁무니를 바싹 따라가는 자전거 선수이든, 로터리에서 교통 정리하는 순경의 경우든, 국산 기관포로 강냉이를 튀기는 아저씨의 경우든, 모조리 그럴싸한 데는 놀라고 만다.-45쪽

이런 늦은 때 무렵에 상큼하니 낯을 쳐들고, 눈이 초롱초롱한 강아지 모습이 또 때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하긴 사람 같으면 이부자리가 있으니까, 자다 일어났다는 걸 알 수도 있겠지만, 강아지고 보면 그렇지도 못했고, 사람은 부스스한 옷매무시나 벙벙한 낯빛으로, 자다 깬 사람은 알 수 있는 법이지만, 잠옷이 없는 이 짐승은 그것도 아니고,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자다 깬 사람이 가지는 그 흐트러진 낌새는 찾을 수 없다. -47쪽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도, 한 번 말이 되어 나와버리면 허물어버릴 수 없는 담을 쌓고 만다.-134쪽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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