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 이윤기 산문집
이윤기 지음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책 중 기억에 남는 일화 하나. (3부 먹자고 하는 짓인데- 에 나오는 얘기다.)

한정식을 좋아하는 이윤기는, 어느 날 한정식을 즐기기가 껄끄러워진다. 저녁 만찬 일정을 걸게 잡아도 되는 날이면 어떻게든 동료들을 꾀어 기어이 한정식을 맛보고, 매일매일 칠첩 반상기에 차려진 사계절 진미를 먹고 싶어했으며, 전주 여행은 전율을 안길 만큼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아하. 이유를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지고 '역시 배울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썹에 이르도록 공손하게 밥상을 들어다 바치는 이른바 거안제미를 누구에게도 시키고 싶지 않고, 쓰레기가 될 남긴 반찬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제대로 차려진 한정식 상에서 주인이 하인들에게 밥상을 물려주는 '대궁밥상' 문화의 슬픈 잔영까지 읽히고 나니, 아이고, 한정식은 이제 죄스러워서라도 못 먹겠구나 생각이 든단다.

그래서 이윤기가 택한 방법은 '날마다 도는 점심상', 회전 초밥이다. 간장 한 숟가락 남짓 따른 다음, 된장국 두 사발 앞에 놓고 앉아 회전대를 도는 초밥 여남은 개 집어먹으면서 된장국 마시면 점심식사가 끝난다. 초밥 접시엔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된장국 사발은 핥아 놓은 죽사발이고 간장조차 적당히 따라서 남아 있을 게 없다. 죄의식 없이 돌아설 때의 개운함이 좋다고 한다.

이게 바로 인간 이윤기이며 작가 이윤기다. 소소한 일상에서도 이것저것 생각이 많은 이윤기의 책은 그래서 읽고 나면 밑줄 그을 곳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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