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의 생일은 비오는 날>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의 원시인들은 날씨 좋을 때는 먹거리 사냥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사냥터로 나갈 수가 없다. 동굴 같은 데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려니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사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잡생각들이 그들의 자의식을 키웠을 것이다. 바로 그 자의식이 형이상학의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21쪽
'내가 이것을 쓰고 그대가 이것을 읽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시계가 뱉어내는 소리는 <째깍, 째깍, 째깍>이 아니라 <상실, 상실, 상실>이다.'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26쪽
갓 삶아낸 국수를 차거운 물에 씻어 건지다가 주위 눈치 한번 살피고, 한 움쿰 덤벅 집어, 쭈욱, 보조개가 아리해지도록, 국수 사리 꼬랑지가 콧등을 철썩 때리도록 빨아들이는 맛을, 물갓이 담백한 그 맛에 묻어 있는 나의 슬픈 과거를 아내는 모를 것이다.-60쪽
나는, 글 쓰는 일 역시 장 거리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장 거리 약장수가 약을 팔려면 먼저 사람을 모아야 하듯이, 글로써 자기 뜻을 전하려면 먼저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게 해야 한다. 읽히는 데 실패한 주장은 발화되지 못한 주장이나 마찬가지다.-125쪽
'Non cuivis homoni contingit adire Corinthum(누구나 다 코린토스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잖겠어).' <살다 보면 그런 수도 있는 거지 뭐>, 이런 뜻으로 하는 말이다.-131쪽
<문화일보>에 서양 신화 이야기를 1년 동안 주간 연재했다. 자랑스럽게 여기거니와 나는 2000년 1년 동안 동안 담당 기자를 곤란하게 만든 일이 거의 없다.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고, 딱 한 번 있었다. 원고가 잘 풀리지 않아서 산보 나갔다가 이문구의 소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사들고 들어와 몇 줄을 읽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담당 기자가 원고 들어오지 않는다고 독촉 전화를 걸어 투덜댔다. 나는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펼치는 실수를 했노라고 고백했다. 담당 기자의 반응은 이랬다.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어요? 거기서 빠져나와 원고 쓰기는 틀렸네요?' 결국 밤새워 원고 써서 보내야 했다.-135쪽
미셀 투르니에 선생의 책 '짧은 글 긴 침묵'과 '예찬'...-171쪽
그의 좌우명은 <콩 세 알>이다. 그는 자신의 <콩 세 알>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농부들은 지게 작대기로 논둑에다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콩 세 알을 넣은 다음 왕겨로 덮는다. 그들이 한 구멍에다 콩 세알을 넣는 뜻은, 한 알은 땅의 주인인 벌레가 먹고, 한 알은 공중의 주인인 새들이 먹고, 남은 한 알만 하늘과 땅을 빌어 한 세상 살다 가는 농부 자신의 몫으로 챙기겠다는 뜻이다.-195-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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