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구판절판


대개 귀국해서 한 달이나 두 달쯤 지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경험적으로 그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결과가 좋은 것 같다. 그 동안 가라앉혀야 할 것은 가라앉고, 떠올라야 할 것은 떠오른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만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굵은 라인이 형성된다.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 이상 오래 내버려 두면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 문제다. 모든 일에는 어디까지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나의 여행법 :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한다--7쪽

축제란 갑자기 요란하게 시작했다가 금세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느릿느릿 계속되는 기나긴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멋진 축제보다는, 언제 끝난다는 기약도 없이 늘어진 비참함 쪽을 즐겼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93쪽

특별히 '운명적인 해후'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묘한 곳에서 묘한 것과 부딪히는 법이다.

-대련에서 하이랄까지--128쪽

해가 지면 몽고의 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뒤덮인다. 여름 해질녘에 보는 초원의 풍경은 호흡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하이랄에서 노몬한까지--153쪽

정말 여행이란 분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정말이지 집에서 스크래블이나 하고 있는 편이 훨씬 정상적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여행을 떠나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이끄는 대로 비틀비틀 벼랑 끝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낯익은 부드러운 소파에 걸터앉아 절실하게 깨닫는다. "아아, 뭐니뭐니 해도 역시 집이 최고야" 라고. 안 그런가?

-병으로서의 여행, 소, 따분한 모텔--180쪽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실제로는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

-병으로서의 여행, 소, 따분한 모텔--180쪽

대부분의 길은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정직한 농부의 영혼처럼 애처로울 정도로 곧게 뻗어 있어, 시력만 좋으면 아주 멀리까지 바라볼 수가 있다.

-병으로서의 여행, 소, 따분한 모텔--185쪽

울타리 안에는 소가 가득 차 있다. 소는 상당히 귀여운 동물이지만, 너무 많으면 역시 보기에 싫증이 난다. 이 세상 일에는 그런 경향 -너무 많으면 보기가 싫어지는- 경항이 있는데, 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병으로서의 여행, 소, 따분한 모텔--185-186쪽

어쩔 수 없이 단념하고 알코올이 빠진 맛대가리 없는 저녁식사를 했다. 그후에 자동차 안을 샅샅이 뒤져 며칠 전 주유소에서 산 채 그대로 방치해 둔, 말 오줌처럼 미지근한 버드와이저 캔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을 호텔로 들고 와 차게 해서 두 사람이 절반씩 나누어 마셨다. 몇 모금 안 되어 안타까웠지만 정말 최고의 맛이었다.
유타 주는 풍경이 아름답고 풍토도 흥미 깊은 곳이었지만, 주 경계를 넘어서 애리조나 주로 들어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후진 마을의 후진 바에서 차가운 버드와이저 맥주를 주문해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켰을 때는 정말 살 것 같았다.
그 순간 이 빌어먹을 세계의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내 몸에 조금씩조금씩 스며 들어왔다. 리얼하게, 차갑게, 음, 세상에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웰컴이라는 이름의 도시, 서부의 차이나 타운, 유타의 사람들--197쪽

이 세상에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양쪽을 구분짓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운명의 힘인데, 그것은 고향에 대한 상념의 비중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나는 후자의 그룹에 속해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기억--2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