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대신 시애틀, 과외 대신 프라하 - 사교육비 모아 떠난 10년간의 가족 여행기
이지영 지음 / 서사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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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신기했던 건 어느 서점을 가도 문제집, 학습지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우리나라처럼 문제집을 푸는 것이 공부라고,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가능한 서점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문제집이 없는 서점. 진짜 서점의 모습 같아 부러웠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 P37

부부는 20만 원 가지고는 피 터지게 싸울 수 있다. 그러나 200만 원일 때는 옆으로 와서 서주는 거다. 무너질 정도면 꽉 잡아주는 거다. - P53

아이는 아무리 보아도 완벽한 동양인이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무리 보아도 완벽한 백인이었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아이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놀고 있는 동안에도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아까 옆에서 놀던 여자아이 기억냐느냐고 말을 꺼냈다.
"엄마가 실수를 한 거 같아. 엄마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 아이가 일본이나 중국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는데 시애틀에서 왔다길래 거기로 이미 온 아이구나 했어.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완전히 백인이더라고. 입양되었을 수도 있고, 재혼 가정일 수도 있는데 엄마가 선입견을 품고 물어본 거 같아. 혹시 "Where are you from?‘ 이라고 물어서 그 아이가 기분이 나빴을까?"
"아닐걸? 시애틀에 사니까 그렇게 대답한 거겠지."
아이라 그런지 단순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혹시 나처럼 그 아이에게 "where are you from?" 을 묻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닌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러 인종과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머리로는 알아도 자연스럽게 여기진 못했구나 반성했다. 어떤 형태의 가족이면 어떤가? 그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손녀를 지켜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데 말이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 P62

아이들은 어느새인가 쿨쿨 잠이 들어버렸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아이들은 상황이 어떠하든 안전하다고 느낀다. 만약 지금이라면 "괜찮은 거야? 우리 무사히 갈 수 있어?" "아빠, 길 알아?" 하며 의심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때가 그나마 그런 안전함을 줄 수 있는, 부모로서의 행복한 시기였음을 지금은 안다. 엄마, 아빠를 온전히 믿고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려가기 위해 우리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험난한 안갯길을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지나왔다. - P91

이 모든 것이 브로드웨이에서 본 <라이온 킹>이 일으킨 나비 효과다. 그래서 지금 하는 우리의 결정, 경험, 생각들은 작지만 귀하다. 많은 것의 시작, 거대한 변화의 작은 날갯짓이니까. - P104

여행은 그 장소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의 일과 연결되고, 이후의 경험과 통하고, 다른 여행과 이어진다. 아무 떄고 넘나들며 오갈 수 있는 신비한 사차원 통로 같다. - P165

똘레랑스를 한눈에 보여준 곳은 정원이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중간중간 만나게 되는 정원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잔디가 보이면 그냥 누워도 되고,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을 수도 있고, 잠깐씩 졸다 가기에도 좋았다. 화단에는 비슷한 색이나 같은 종끼리 모아서 심는 우리식 꽃밭과 달리 여러 종류의 꽃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길고 짧은 것, 크고 작은 것, 다양한 색을 가진 꽃들이 섞여 있는데 신기하게도 전혀 산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조화롭고 안정감 있게 보였다.
아, 저런 게 똘레랑스구나!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것. 달라서 오히려 화려한 것. 서로를 인정할 때 더욱 보기 좋은 것. - P202

돌아와서도 뱅센느 숲이 자꾸만 생각났다. 파리 여행 중 제일 좋았던 곳이지만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묻는다면 표현하기가 어렵다. 여행 책자에 올리라고 하면 역시 사진 한 장과 짧은 문장 몇 줄이 되겠지. 감정의 크기는 정보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뱅센느 숲이 알려준 깨달음이다. - P223

일상을 보내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풍경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다. 지명을 대기 어려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담긴 장소들이다. 그래서 여행을 가면 숙소 근처 마트나 식당, 동네 놀이터, 서점 등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같은 이유로 프라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골목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치 내가 현지인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일상의 공간이라서. - P239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고 걸었더니 뒤에서 큰딸이 우리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아이 하나씩 손 붙잡고 다녀야 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 겨우 편하게 남편 손을 잡는다. 이제 겨우 앞만 보고 걷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이가 사진으로 남긴다. - P311

우리가 더 낯선 곳으로 갈수록 가족의 의미가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다. 아무도 우리를 챙기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귀하기 떄문이다. 서로가 아니면 의논할 사람이 없으니 남편과도 좋은 파트너가 되어야 하고, 아이들도 부모가 아니면 자신들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채워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여행 하나하나를 이렇게 회상한다. 함께 했기에 진짜 행복한 ‘해피 투게더‘였다고.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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