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의 대상이나 상황 등 현실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해하다‘의 의미를 자칫 머리로 파악한다는 뜻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온몸으로 ‘느껴야‘ 가능합니다.그렇게 형성된 지식만이 삶에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 P36

자동차에 앉아 운전대만 잡으면 돌변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가 자동차의 실질세계, 즉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기구라는 사실에만 충실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 운전자는 시간을 벌었을까요? 그렇게 운전해서 혹시 목적지에 일찍 도착했을지는 몰라도 그는 시간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서둘러 가는 동안의 시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그에게는 목적지로 가는 길의 시간이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이는 실질세계만이 삶의 모든 가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 P40

당시에 주인으로 표현되는 자유인은 노예를 부리며 여분세계에서만 자기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죠.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일을 하면서 자기 실질세계를 꾸려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예와 같지 않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질세계를 충실히 살면서도 실질세계에 함몰되지 않는 시선을 갖추는 것입니다.현실을 살면서 현실에 갇히지 않을 때 진정으로 주인이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삶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 P43

문화라고 하면 흔히 음식이나 의복 또는 주거 등을 이야기하는데, 그것들 자체가 문화가 아니라 그것들에 담긴 스타일이 문화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가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그곳의 음식이나 의복 또는 주거가 원래 살던 곳과 달라서라기보다,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의식주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서 받는 이질감을 말하는 겁니다. - P74

500여 년 전 지동설이라는 진리를 밝혔지만, 그래도 여전히 천동설에 입각해서 표현합니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고 말입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죠. 물론 이론상으로는 지동설이 진리인 것은 알지만, 매 순간 그런 것까지 따지지 않고 지각하는 대로 말하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넘어서야 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은 습관과 같은 말이지만 당연한 표현이 아닙니다. - P92

농인은 원래 청각장애인을 낮춰 부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바뀌었지만 본래 ‘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농이라는 글자를 다시 볼까요. 용(龍)의 귀(耳)라는 단어입니다. 용의 귀를 가졌기에 사람의 소리는 못 듣지만 용이 듣는 다른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예술적인 상상력이 포함돼 있죠. 말하자면 농인에게는 일반인과는 다른 소리가 있을 거라는 상상이 포함되어, 그를 단순히 장애인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신비롭게 보며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청력이 상실되었다고 모든 감각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르 감각이 더 발달하여 일반인과는 다르게 세상을 인지합니다. 평범한 일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 P109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요즈음 현대인의 행동양식에 척도와 비례로 작용하는 주요 인물은 이르바 스타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타의 언어 구사, 외적 스타일 등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죠. 또한 행동요령이나 술수를 가르치는 처세서가 현대인이 행동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어른이 부재한 시대의 씁쓸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스타 대신 영웅이 있었고, 처세서 대신 연극이 상연되었습니다. 연극에 나오는 영웅은 이전 시대에 행동양식의 척도였고 비례였습니다. 특히 그랬던 시절이 고대 그리스였습니다. - P119

그런데 매우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띤 음악이 뜻밖에도 논리적인 성질을 지닌 수학에서 출발합니다. 이성으로 감성을 담아낸 것이지요. - P154

살아가면서 꿈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막연한 꿈은 희망을 안겨주기보다는 절망을 낳습니다. 절망은 꿈의 반대말이 아니니까요. 오래된 꿈이 절망입니다. - P174

작가 위다는 무역항이 있는 번잡한 도시 알트베르펜이 지저분하고 부산한 장사꾼들이 아니라 화가 루벤스의 그림이 있기에 의미 있는 도시라고 동화(플랜더스의 개)에서 직접 말합니다. 한 도시의 이름이 그 도시에 살았던 예술가의 존재 덕분에 빛나고 기억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 P243

안톤 체호프가 쓴 단편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통속적인 TV 연속극 같은 내용인데, 같은 시대의 작가 막심 고리키는 이 작품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나니 다른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지는군요." - P249

눈이 와서 멜랑콜리하다고 하면, 눈의 의미는 멜랑콜리에 갇힙니다. 그 이상, 내리는 눈이 주는 느낌은 사라지죠. 눈이 와서 불편하다고 하면 미끄럽고 질척한 길만 떠올리게 됩니다. 더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규정해서 내린 결정에 현실이 갇히는 꼴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하고 가볍게 ‘눈이 내린다‘고 하면 오히려 단순하지 않게 여러 의미를 줍니다. 사람들마다 또 다르게 말이죠. 내리는 눈이 어떻다고 정해주지 않으니까요. - P295

"여행이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
- P300

이국의 땅을 처음 밟은 사람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풍경도 그렇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거리의 가로수마저 새롭습니다. 짧은 기간 여행한 사람이 이국의 문화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무른 사람이나 아예 정착한 사람은 점점 할 이야기가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렇게 말하고 맙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러면서 이국의 문화를 잠깐 접한 사람들이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선한 시선을 잃은 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익숙해지는 것, 그것은 첫 시선의 생생함을 잃는 일입니다. 모든 사물은 첫 시선에 포착될 때 가장 생기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익숙해지면 그 생기는 시들다가 끝내 소멸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시선인 셈입니다. - P302

여행은 가끔은 꼭 필요합니다. 시선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이국의 낯섦을 즐긴다는 뜻에서만 여행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여행은 원래 살던 곳의 진부한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합니다. 누구나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과 그곳의 일상이 새롭게 보이니까요. 여행은 당연한 삶을 낯설게 만들어서 생동감을 되살립니다. - P304

......마지막으로 예술과 함께라면 우리의 삶이 왜 행복해지고 또 어떻게 행복해지는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한번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마음을 움직였거나 아니면 어떤 느낌을 안겨준 예술작품 하나를 가까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한 장의 그림이어도 좋고 음악 한 곡, 또는 시나 소설 한 편이어도 좋습니다. 영화나 연극이어도 됩니다. 한 편의 작품을 말입니다.
예술작품은 아무런 전문지식이 없어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어설픈 지식이 작품 감상을 방해하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한 작품을 마음에 두었다면, 거기에는 아주 단순한 까닭이 있을 겁니다.기뻤다거나 슬펐다거나 아니면 예쁘다고 느꼈거나 하는 이유 말입니다. 일단 그렇게 작품을 감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끌렸기에 차츰 왜 기뻤는지, 왜 슬펐는지, 아니면 왜 예쁘다고 느꼈는지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그러면 차차 그 까닭을 따져보게 되겠죠.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인식능력이 커져갑니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해석능력은 주입식으로 받아들인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앎을 만들어나갑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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