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이 안 오던 새벽에 집어든 책. 그런데 몇 장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고 결국 밤을 꼬박 새고야 말았다. 케케묵은 '사랑' 이야기일 뿐인데, 진부하고 일상적인 '연애' 이야기일 뿐인데, 이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남자의 언어를 알아야 연애에 성공한다거나, 남자에게 잘 보이려면 이런 화장법과 이런 옷차림과 이런 화법에 능숙해져야 한다는 시중의 그렇고 그런 연애지침서들을 보란듯이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다. 연애가 잘 안 풀릴 때마다 점집에 점을 보러 가는 대신 집어들었던 책들이었지만, 그것들이 한참이나 어린 연하 애인과 시시덕거리는 놀이 수준이었다면, 이건 다섯 수레의 책을 읽고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연상의 남자와 수준높은 '어른의' 연애를 하는 느낌?!!

꽤 오래 전 일인데, SBS 야심만만에 최강희가 나와서 했던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았었다. 그녀는 애인에게 '나는 너를 마시멜로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책에서 읽었다며 닳고 닳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마시멜로한다는 말로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고.. MC와 게스트는 물론 방청객까지 순간 '오~' 하며 감동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이런, 그게 알랭 드 보통의 책이었구나. 책 속 마시멜로 구절을 발견하면서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다. 이것도 그들만의 '집안 언어'겠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마시멜로해 라는 말을 속삭이고, 오늘 상대를 좋아하는 정도를 10점 만점으로 점수화하고, 클로이 대신 티지라는 이름을 만들어주고.. 나는 집안 언어를 쓸 만큼 사랑에 빠졌던 때가 언제였던가 되돌아본다. 아, 3년이나 됐구나. 그와 내가 쓴 집안 언어들. 곰(고마워), 별(별 말씀을), 즐똥(화장실 주문) 등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우리 둘만 아는 언어란 생각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그 후로 두 번의 연애를 더 했지만 '집안 언어'는 쉽사리 나오기 힘들더라. 사랑을 하기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

간혹 올인하는 연애를 한 후 헤어질 때마다, 머리 밀고 절에 들어갈까, 죽어버릴까, 혹은 죽여버릴까 등등 온갖 험한 상상을 했었는데, 진작 이 책을 알았더라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이지만, 그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으면서 무거운 사랑의 짐을 내려놓고 오아시스까지 뛰어갈 수 있다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죽으면 상대는 충격을 받겠지만 정작 죽은 나는 상대가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볼 수가 없고, 그 충격받은 모습을 보려면 살아 있어야 하고.. 죽느냐 사느냐 햄릿에 대한 대답은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것. 어렵지만,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또 훌륭한 자살방지서다.

시작하는 연인들이라면, 격정적인 사랑 중인 연인들이라면, 헤어지려는 연인들이라면, 그리고 헤어져서 수렁에 빠진 연인들이라면, 알랭 드 보통에게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단체로 런던대학교에 유학이나 가자고 꾀고 싶다. 박식하고 착하고 분명히 잘 생겼을 알랭 드 보통,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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