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9쪽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30쪽
어쩌면 침묵과 서툰 태도는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46쪽
구애과정에서의 거짓말은 다른 영역에서의 거짓말과 매우 다른 면이 있었다. 내가 경찰에게 자동차 속도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이유 때문이다. 벌금이나 체포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에는 좀더 비뚤어진 가정이 수반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53-54쪽
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둘러싼 공식적 신화이다.-63쪽
우리가 아는 또다른 마르크스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우리는 그 터무니없는 모순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
클럽에 가입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클럽에 가입함으로써 그 소망을 잃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75쪽
우리는 밤에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그 책들이 서로 다른 대목에서 감동을 주었으며, 결국 우리 각각에게 그 책은 다른 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 줄의 사랑의 메시지에도 똑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125쪽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험프리 보가트와 로미오에게 눈을 찡긋하며,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133쪽
상대의 특징들을 의식하면서 우리에게는 서로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사랑은 사랑이 만들어내지 않은 이름을 들고 우리를 찾아온다. 그것은 태어날 때 부모가 준 이름이고, 여권과 등록증에 공식적으로 적힌 이름이다.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독특함을 찾아낸다는 것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름으로 그 독특함을 표현하고[비록 간접적이라고 해도]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클로이는 그녀의 사무실에서는 클로이였지만, 나에게는 [우리 둘 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그냥 티지였다.-151쪽
두 사람이 서로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함께 이야기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 사전에서 정의된 담론의 언어로부터 멀어진다. 익숙함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두 연인이 함께 짜 내려가는 이야기와 관련을 맺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는, 친밀성에 기초한 집안 언어이다. 그것은 공유된 경험의 축적을 암시하는 언어이다. 거기에는 관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언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과 달라진다. -158-159쪽
클로이와 내가 흔히 주고 받는 농담이 있었다. 우리의 감정의 변덕을 인정하고 사랑의 빛은 전구처럼 항상 타올라야 한다는 상식적인 요구를 완화하기 위해서 헤라이클레이토스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 오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둘 중의 하나가 그렇게 묻는다. "덜 좋아해." "그래? 아주 많이 덜?" "아니,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10점 만점이라면?" "오늘? 어, 한 6.5 정도. 아냐, 6.75에 더 가깝겠네. 너는 어떤데?" "어이쿠, 나는 마이너스 3 정도인데. 오늘 아침에 네가 ......할 때는 12.5 정도였던 것도 같지만."-185-186쪽
어떤 사람이 현재의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과거의 사랑을 대하는 무관심에는 특별히 잔인한 면이 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또는 서점]을 건넌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193쪽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온 세상 사람에게, 특히 클로이에게 보여줄 수 있으려면 죽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클로이에게 준 충격을 보고 화를 풀려면 나는 살아 있어야 했다. 그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햄릿에 대한 내 대답은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259쪽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는 시간표가 꽉 짜인 현재의 무자비한 역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개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267쪽
시간은 자신을 생략한다. 확장된 상태에서 살지만 수축된 상태에서만 기억되는 아코디언 같다. 클로이와 함께 했던 삶은 얼음 조각과 같아, 현재로 옮겨오는 동안 차차 녹아버렸다. -271쪽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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