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주 한 잔 합시다
유용주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10월
절판


이 고장의 안개는 유명하다. 고지대인데다 분지 형태여서 사시사철 안개가 끼었다. 그렇다고 끈적끈적하거나 불쾌한 느낌을 주는 안개는 아니었다. 꼭 무슨 잘 마른 풀에 불을 붙였을 때 나오는, 습기가 죄 빠져버린 연기 같은 안개, 구수하고 들큰한 나무 냄새가 나는 그런 안개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개 끝엔느 늘 촉촉한 물방울 한두 개쯤은 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 자궁을 빠져나온 이래로 우리 모두 슬플 때나 기쁠 때 달고 다니는 눈물방울 비슷한 거였다.-14쪽

오래전 중국의 어떤 천재화가도 그랬다네.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이 귀신이었다고 말이야. 귀신을 본 사람이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이치겠지. 그럼 무엇이 가장 그리기 어려우냐 물었더니 개나 말이라도 답하더래.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것들이라 자칫 잘못 그리면 욕먹는다고 말일세. 소인은 산으로 숨고 대인은 사람 속으로 스며든다는 말 자주 들었겠지. 그리하여 소소한 일상을 노래하는 작품이 가장 쓰기 어려우며 어려운 만큼 가장 크고 장엄한 노래일 수도 있다는 말일세.-29쪽

바다가 물방울로 이루어진 감옥이라면 까짓것 손 끝으로 툭 터뜨리면 될 것이다. 바다에서 손가락 같은 존재는 섬이다. 저 거대한 물방울을 톡 터뜨릴 수 있는 무기는 섬밖에 없다. 섬은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69쪽

배가 지나간 자리에 흰 빨래 눈부시게 펄럭인다. -73쪽

술은 시를 낳고 바다는 파도를 낳고 하늘은 구름을 낳고 별은 별똥별을 낳고 달은 밤바다에서 해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96쪽

물빛은 그 색깔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한 움큼 떠서 붓질을 하면 바로 수채화가 될 것 같고, 또 한 움큼 떠서 급속 냉동시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석이 될 것 같다. 녹지 않는 기술만 개발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보석가게 주인이 될 것이다. 물 속에는 눈빛이 서늘하고 머리카락이 긴 인어가 살고 있겠지. -98쪽

옛날 여수 출신 뱃사람이 난바다에서 표류했다. 어선이 조난을 당했다. 잠시 혼절했다 깨어났더니 거북이 등에 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는데 그 사람 혼자 살아남았다. 거북이는 등에 무엇이 붙어 있으면 절대 바닷속에 들어가지 않고 떠 있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104쪽

문득, 생각이 난다. 지금 이 장면이 나, 서너 살 때, 부산 전포동 황령산 중턱에서 바로 이 풍경을 생생하게 봤다는 거다. 꿈 속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이미 나는 지금을 살아버린 거다. 데자뷰.-122쪽

해는 직선으로 걸어와 나를 관통해 버린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나는 뻥 뚫린다. 해는 대략 3미터 너비의 금빛 주단을 깔고, 그 위에 배를 사뿐히 들어올려, 얇디얇은 금실로 배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항해 중에 오늘 해넘이가 제일 뚜렷하다. 아름다운 인질이다. 하늘이 시뻘겋게 술에 취해, 알코올 냄새 지독한, 뜨끈뜨끈한 똥을 물컹 싸질러 버린다. 금빛 똥통에 빠진다. 빠져버린다.-123쪽

소설을 쓰시는 대선배 박상륭 선생께서는 아름다움이란 '앓음다움'에서 온 말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가을은 앓는 계절이다. 많이 아픈 다음에야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149쪽

소설(小雪)에 소설처럼 눈이 내리더니 햇빛이 들면서 녹기 시작했다. 왜 깨끗한 것은, 깨끗한 것의 뒷모습은 저렇게도 지저분할까.-154쪽

아부하는 데에는 의자를 따를 자가 없다. 그는 오로지 떠받들기 위해서 태어났다.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전 생애를 건다. 누가 앉든지 차별하지 않는다. 일편단심이다.-165쪽

무슨 말씀을 하셨던가. 허구한 날 싸구려 술로 좋은 몸뚱이 망가뜨리지 말고 술도 안주도 질을 높여 삶의 질을 높이라고 말씀하셨던가. 세 살 술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술버릇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술버릇 나쁜 개망나니 곁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던가, 글 쓰는데 무거운 책임을 가지라고, 장난치듯 가볍게 쓰지 말라고, 자기 이름을 달고 나온 글은 죽은 다음에도 책임을 져야 하니 진지하게 다가서라고 말씀하셨던가, 파도 소리와 함께 비몽사몽간에 들은 선생님 말씀은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말았다.-174쪽

입동이 지나자 찬비 내리고 바람 싸늘히 불었다. 몇 닢 남은 잎새 다 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춥고 배고픈 겨울이 닥쳐 오리라.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다니는 낙엽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진다. 그래도 저것들은 썩어 거름이 되어 내년 봄 연초록잎을 환하게 내뿜으면서 살아 돌아올 텐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새 많은 세월이 흘렀고 존경하는 선배들을 많이 잃었다. 그곳은 얼마나 좋은 곳이길래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편지 한 장 없다.-201쪽

소주잔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목수팀은 소주를 맥주 컵에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슬픔과 분노로 벌겋게 달은 못을 서로의 가슴에 대고 쾅쾅쾅 박아댔다. 못은 구부러지지도 않고 잘도 들어갔다.-204쪽

'비단결 같은 서정의 눈물방울'이라고 찬사를 받았던 감성의 작가 한수산의 '부초'-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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