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의지2.0>의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일반의지2.0>의 역자 안천이 저자 아즈마 히로키를 만났다. 이 인터뷰는 2012년 6월 11일 오후에 아즈마 히로키가 대표를 맡고 있는 겐론사에서 진행되었다.
언뜻 봤을 때 아즈마 히로키는 각기 전혀 다른 분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서들을 써왔다. 하지만 그가 펼쳐온 사유의 궤적에는 뚜렷한 일관성이 확인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 ‘의식과 의식 외부’라는 큰 틀 속에서 여러 현상을 논해왔다. 이는 <일반의지2.0>의 대전제이기도 하다. 그가 왜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는지를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이후 역자 안천은 ‘안’으로,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아즈마’로 표기한다).
서브컬처 비평에서 ‘일반의지2.0’까지 - 아즈마 히로키 사상의 안과 밖
1. 아즈마 히로키 사상의 전체상
안 : 아즈마 씨는 지금까지 현대사회를 근대(모던)와 탈근대(포스트모던)가 공존하는 사회, 즉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가지 원리가 각자 고유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공존하는 사회로 파악해왔습니다. 근대와 탈근대의 차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즈마 : 일본은 서양의 근대사회 모델을 적용하기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일본 사회를 사유할 때 근대를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점을 전근대적 특성이 잔존하고 있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서양식 근대 모델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일본이 순조롭게 탈근대사회로 이행했다고 볼 것인지는 저마다 입장이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근대’와 ‘근대가 아닌 것’ 사이의 상극 혹은 충돌이라는 관점 없이 일본 사회를 논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근대와 탈근대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의 경우, 근대문학이라는 틀로는 일본 문학의 극히 일부만 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읽히고 있는 문학 전체라는 틀에서 생각했을 때, 사소설로 대표되는 순문학 혹은 근대문학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문학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근대문학 외의 관점을 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라이트노벨은 전근대적인 전통과 근대 이후의 미디어믹스 문화, 달리 말해 전근대와 탈근대가 결합한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근대를 우회해서 탄생한 문학의 형태가 라이트노벨일 것입니다. 일본에 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안 : 아즈마 씨는 현대사상, 서브컬처, 정보환경의 변화 등 포스트모던적인 현상이 두드러진 영역에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들을 언어화하고 가시화하는 이론적인 얼개를 구축하는 데에도 힘을 쏟아왔습니다. ‘존재론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구분(<존재론적, 우편적>), 서브컬처 분야에서 일어난 ‘상상력의 환경’의 변화를 이론화한 작업(<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근대의 ‘규율 훈련형 권력’과 전혀 다른 작동 원리를 지닌 ‘환경 관리형 권력’의 개념화(<정보자유론>) 등을 그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는 인간 의식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자기 수정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즈마 씨는 포스트모던을 형상화하면서 ‘의식의 외부’에서 구동하는 여러 환경에 의해 의식이 강하게 제약받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이들 제반 환경의 작동 원리를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아즈마 씨의 의식을 ‘의식의 자기 성찰’보다 ‘의식 외부의 환경’으로 향하게 하는 동인은 무엇입니까?
아즈마 : 제게는 세상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실제로 근대적인 주체성 혹은 재귀적인 자의식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사람들이 의식 외부를 주목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소위 현대사상, 즉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상가들은 근대문학의 극한이나 근대적 주체의 극한이라는 주제를 선호해서 “근대적 주체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주체의 외부’가 현현(顯現)한다”는 유형의 논의를 펼쳐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아니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주체 외부’가 먼저 존재합니다. ‘공 모양의 자의식’(‘自意識の球体’를 ‘공 모양의 자의식’이라고 번역했다. 일본 문예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의 말로 ‘자의식이 자의식을 대상화하는 운동은 결코 자의식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문제를 지적할 때 쓰인다. 자의식의 운동 자체는 끝없이 계속되지만, 그 운동의 궤적은 닫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이다.)을 문제시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자의식 자체가 공 모양이 아닐뿐더러 ‘공 모양의 자의식’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철학이나 문학 분야의 문제 설정 자체가 전도되어 있다고 느껴왔습니다. 의식에서 출발해서 ‘의식 외부’로 향하는 논리 구성 자체가 전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식 외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동물성, (일종의) 기계적 제어, 물질로서의 신체 등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근대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기분’을 언급합니다. 하이데거는 ‘기분’이라는 개념을 상당히 추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즉물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기분은 ‘건강하다 / 아프다’와 같은 신체적인 차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신체의 문제이지 ‘존재의 목소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대체로 ‘의식의 외부’를 유난히 신비화했지만 이를 즉물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로 경제와 산업 분야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경험은 멀티플렉스의 넓은 좌석에 앉아 코카콜라를 마시는 신체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현재 문화 산업은 신체를 포함한 종합적인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체를 비롯한 ‘의식 외부’를 즉물적으로 조절하고 관리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철학 분야의 ‘의식의 외부’ 문제와 산업 경제 분야의 ‘의식의 외부’ 문제가 교차하는 곳에 제가 가진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저의 친척 가운데 지식인층이 없다는 것이 큰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공 모양의 자의식’ 같은 이야기는 부모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것이 일반 대중의 감각입니다. ‘공 모양의 자의식’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소수의 지식인층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 같은 보다 동물적인 욕구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고민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층이 아닌 일반 대중을 향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안 : 다방면에 걸친 아즈마 씨의 저서 가운데 서브컬처 비평서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그리고 소설<퀀텀 패밀리즈>가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정황으로 유추해보건대 아즈마 씨는 한국에서 서브컬처 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브컬처에 관해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아즈마씨는 10여년 전에 가라타니 고진을 중심으로 한 <비평공간>과 결별하고 서브컬처 비평가의 길을 걷는 대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와, 특히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이제 서브컬처 비평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지 서브컬처 분야 자체의 변화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에서 서브컬처의 위상 변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즈마 : 지진 후에 ‘서브컬처 비평은 하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지진 이전부터 서브컬처 비평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평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2000년대 전반에 느꼈던 가장 큰 문제는 쉽게 말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1950~1960년대 출생의 논객들이 오랫동안 젊은 층을 대표하는 세대로 눌러앉아 있었고, 제 또래의 세대는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서브컬처 비평이 가치 전도의 수단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지진 이전인 2000년대 후반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또래 세대 혹은 그 아랫세대가 등장하면서 2010년을 전후해 일본 평론계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저는 오히려 윗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계속 신인으로 취급되었는데 지금은 중견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치 전도를 목적으로 한 서브컬처론, 그러니까 젊은 문화론은 이제 제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브컬처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제 역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일본 서브컬처 자체에 대한 저의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그리고 지금도 역시 ‘이 나라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서양에서 유입된 고급문화가 아니라 야생의 서브컬처에서 탄생한다’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참신한 서브컬처의 발견은 새로운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령면에서도 저는 그런 작업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은 가치 전도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게임, 인터넷 등이 만연한 일본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기 때문에 서브컬처와 관련된 활동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일반의지2.0>에 이르기까지
안 : 한국에서 아즈마 씨는 현대사상을 논하는 철학자, 서브컬처 비평가 그리고 소설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치사상’을 주제로 한 <일반의지2.0>의 간행은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사상을 직접 논하게 된 경위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즈마 : 원래 저는 철학을 해왔기 때문에 제 곁에는 항상 정치사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정치를 논하는 것은 매우 따분한 일입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정치는 지적인 고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정치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고, 일본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세의 분석이나 정치인 개인의 가십 등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반의지2.0>을 통해 정치로 전환했다는 의식은 사실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정치적인 제안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브컬처 비평으로 수용되었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담긴 문제의식, 그러니까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문제들을 서브컬처적인 문맥에서 분리시켜 더 추상적인 형태로 논한 측면도 상당히 강합니다. 어쩌면 이 책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속편으로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제 또래의 세대는 제일 먼저 인터넷을 접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등을 운영하고 또 이용하면서 엔지니어나 IT기업 경영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환경이 가져오고 있는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사회사상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엔지니어나 경영자들도 자신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언어로 설명해주고 비전을 만들어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상황에서 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기도 합니다.
안 : 아즈마 씨가 해석한 루소, 설명을 덧붙이자면 “의사소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의견을 몇 가지 대립축으로 환원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성을 억압하고 만다. 소통 없는 의견의 집약이 가능해지면 원래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집단지성’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의사소통을 경유해서 단순화를 거친 판단에 비해 보다 정확한 판단을 이끌어낼 것이다”라고 ‘일반의지’를 재해석한 부분이 특히 신선합니다. 이 해석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상가와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반의지2.0>을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아즈마 씨가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루소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참고로 한국어판 <일반의지2.0>은 루소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서 루소가 태어난 6월 28일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아즈마 : 루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전부터 루소를 읽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루소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아마도 2006~2007년쯤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루소를 선택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책에서 인용한 “의사소통 없는……”이라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제 안에서 별개로 존재하고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이 한순간에 전부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일본어 전집을 구입해 읽어가면서, 단순히 ‘사상가’로서의 루소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루소의 전체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소의 정치사상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전기적 사실도 포함해 ‘루소라는 인간’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의 그 구절을 읽은 것이 루소를 논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왜 <사회계약론>을 읽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안 : 일본어판 서문에서는 이 책을 구상하게 된 ‘일본 사회 고유의 맥락’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지2.0』의 내용 자체는 자본주의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느 사회나 공유하고 있을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일정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모처럼 한국어판이 간행되므로 이런 과격한 제안을 하게 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공통된 맥락’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즈마 : 우선 현대사회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헤겔이 생각했던 절대정신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사회 전체를 아우르기 힘듭니다. 달리 말해 복잡성이 증대해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일정 수준의 인권 의식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냐, 물건으로 취급할 것이냐’라는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통계의 숫자로, 노동력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근대적인 인권 의식이 충분히 침투하지 않은 사회에서 인간은 대부분 물건 취급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런 지역이 존재합니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인권 의식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으로 존중받는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사물적인 측면을 통계적으로 취급하는 시점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의지2.0>의 제안은 ‘지금까지 우리는 유권자를 오로지 고유의 주체로 다루어왔지만, 오히려 유권자의 의지를 사물처럼 다루고 수학적으로 취급하는 방식도 추가로 고려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인권 의식이 사회에 스며든 정도에 따라, 이 제안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저는 충분히 민주화된 사회, 그러니까 충분히 인권 의식이 침투했고 충분히 다양성이 확보된 사회에서만 일반의지2.0이 기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의지2.0은 단순히 전체주의를 긍정하는 이론이 되고 맙니다.
3. <일반의지2.0>의 내용
안 :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니클라스 루만이 말한 ‘복잡성의 감축’도 불가피하게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정치의 영역에서는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 감축의 역할을 해왔습니다만, 복잡화에 가속도가 붙은 현대사회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감축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과 정보가 증가해 상호작용의 그물망이 촘촘해지고 있는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서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위기의식이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사회에서 일정 정도 공유되고 있는 위기의식입니까?
아즈마 : 일본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양당제가 자리 잡은 이후, 2009년에 민주당이 자민당을 이기고 54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2009년 가을에만 해도 사람들은 정치제도를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정치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본에서는 ‘자민당은 이렇지만 민주당은 저렇다’라는 차원이 아닌, 현재의 정치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감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의회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선거라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신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 : 그런 위기의식 속에서 출간된 이 책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즈마 : 3만부 이상이 읽혔고 호의적인 서평도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의지’라는 말의 인지도도 높아졌고, 저의 책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책이 나온 지 6개월이 막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형태로 읽히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민주당은 ‘숙의’를 주요 모토로 내걸었습니다. 이 책은 “숙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데이터베이스로 보완해야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강령에 직접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점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구체적인 정치적 문맥과도 얽혀 있습니다. ‘숙의’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민주당 집권 이후로, 이전에는 전문가만 쓰던 전문용어였습니다. 지금도 민주당은 숙의를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숙의는 실패한 상태입니다.
안 : 한국에서는 ‘숙의’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숙의에 대한 설명을 한국어판에 따로 덧붙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즈마 : 숙의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당에는 스즈키 간(鈴木寛)이라는 관료 출신 참의원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도 맡고 있어서 숙의 민주주의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탄생한 후,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가 스즈키 의원의 연구 내용을 접했고 그 후 이 말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 스즈키 의원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저기 밑줄을 치면서 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자리를 마련해서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식의 반응도 있습니다.
안 : 이 책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 이력을 집약한 데이터베이스를 적절하게 분석하여 ‘사회의 집합적 무의식’을 가시화하는 과정이 지니는 의의를 논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집합적 무의식을 언급할 때는 일반적으로 프로이트보다 융이 논거로 쓰이는 경향이 있는데, 아즈마 씨는 <존재론적, 우편적>을 발표했을 때부터 이미 프로이트를 높게 평가해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즈마 : 제 학문적 원점이기도 한 현대사상 분야에서 융은 오컬트나 뉴에이지에 가까우며, ‘프로이트의 학문을 왜곡시킨 인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저 역시 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융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지금 말한 것처럼 일본에서 융이라고 하면 뉴에이지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만약 이 책에서 프로이트가 아닌 융을 언급했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되었겠지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융을 논거로 삼으면, 인터넷을 경유해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뇌가 직접 연결되는 이미지가 되기 십상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융을 참조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이트는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진 객체이지만, 흩어진 개개인들이 뱉어낸 데이터를 끌어 모으면 데이터 차원에서만 집합적 무의식이 출현 한다’는 이 책이 제시한 이미지와 부합합니다.
4.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서
안 : 한국의 독자에게 익숙한 가라타니 고진과 아즈마 씨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을 명확히 해두면 한국 독자들이 아즈마 씨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라타니에 관한 질문을 두 가지 준비했습니다.
가라타니는 1990년대 후반에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제비뽑기’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일본 정신 분석의 기원>). 여기에는 불투명성과 우연성을 제도 안에 도입해 예정 조화적인 사고 형태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일반의지2.0>은 ‘무의식의 가시화, 의사 결정의 투명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의 제안과 대비됩니다. 한편 ‘이성(혹은 의식)의 외부’를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도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일반의지2.0>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가라타니의 ‘제비뽑기’는 어떻게 비칩니까?
아즈마 : 가라타니의 주장을 요약하면 “숙의의 원리에 따라 토론을 거친 후에 ‘이것이 모두의 통일된 견해이다’라고 말해봤자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며 얼마든지 뒤집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를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라”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서로 대화를 거듭해서 어떤 합의에 이른다”는 믿음은 일종의 허구로, 실제로는 그 외부가 없다면 대화는 한없이 계속됩니다. 제비뽑기의 우연성이 본질이라기보다는 ‘숙의의 외부’를 제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입장이 갈립니다. 저는 가라타니가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비뽑기는 아주 알기 쉬운 외부인데 반해, 제가 제안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외부인 척한다’고 해야 할까요? 달리 말해 가라타니의 제비뽑기는 일종의 부정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안 : ‘외부’의 문제는 마침 두 번째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아즈마 씨는 전부터 가라타니가 논해온 ‘타자’나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가 옹호해온 ‘타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그리고 <일반의지2.0>에서는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컬 리버럴리즘ironical liberalism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즈마‐로티의 타자관과, 가라타니‐다카하시의 타자관은 어떻게 다릅니까?
아즈마 : 가라타니나 다카하시의 타자는 궁극적으로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로티의 타자는 동물이라고 할까, 가까이에 있는 애완동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애완견은 타자인가?”라고 물었을 때, 가라타니나 다카하시는 애완견을 타자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티는 애완견이야말로 타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봤을 때 이는 사람을 동물로 취급하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로티는 “눈앞에 있는 인간이 고통스러워하거나 아파하면 사람은 손을 내밀고 만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된다”라고 주장하지만, 가라타니나 다카하시는 이러한 감각을 ‘타자와의 직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타자는 이런 공감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따라서 종교적인 개념에 가깝습니다. 종교적인 개념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타자를 강조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 인간에 대한 공감이나 동정을 파괴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티 쪽을 지지합니다.
안 : 그런 의미에서 가라타니가 말하는 외부는 낭만적이라는 것입니까?
아즈마 : 그렇습니다. 타자란 애써 따로 발견하려고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에 있는 존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비평공간>도 처음에는 철학의 신학화에 저항하고, 이와 같은 ‘작은 타자’에 대한 감성을 중시하는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비평공간>이라는 좁은 범주 안에서 논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신학적인 논의에 가까워졌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5. ‘대의제 민주주의’와 ‘집합적 무의식’의 상호 보완
안 : <일반의지2.0>에 따르면 다양성이 충분히 확보되었을 때 일반의지2.0의 정확성은 신뢰할 만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집합적 무의식이 다양성을 배제하는 쪽으로 향할 위험성, 주류적 사고의 우위성을 증폭시키는 회로로 기능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결과적으로 일반의지2.0의 신뢰성을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양성의 보장’과 ‘집합적 무의식’은 양립 가능한 것입니까?
아즈마 : 다양성은 개별성의 원리에 속하고, 집합은 통계의 원리에 속합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집합으로 파악하는 순간, 개별적으로 보고 있었을 때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예컨대 신장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정규분포에 따라 존재할 뿐이며, 여기에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정규분포는 동일한 선을 그립니다. 전혀 다양하지 않지요.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면 다양한 키 차이가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같은 현실에 대해 다른 시점을 도입해보자’는 시도이며, 데이터베이스와 숙의는 서로 배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일반의지2.0을 도입하면 다양성이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통계 데이터를 뽑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통계 데이터가 이렇다’는 것과 ‘정책 결정을 할 때 어느 것이 옳은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계 데이터를 보면 전체적으로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정보를 보면서 전문가들이 숙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숙의가 결정합니다.
이 또한 한국 등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숙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숙의나 대화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담합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좁은 밀실 안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숙의와 담합은 닮아 있습니다. 일본에는 이런 유형의 ‘숙의’가 넘쳐납니다. 폐쇄적인 ‘숙의’를 에워싸고 있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대중의 목소리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으며, 대중의 목소리를 추출해내려면 기계적인 처리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적인 처리를 거치면 대중의 목소리는 평면적인 것이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는 사라지지만 그나마 이런 회로가 전혀 없는 상태로 좁은 숙의가 계속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이것이 저의 취지입니다. 결코 ‘대중의 무의식에 따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이 책이 일본에서 이야기될 때 몇 번이나 문제가 된 부분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미리 설명하고 싶습니다. <일반의지2.0>은 ‘대중의 무의식에 따르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시화된 대중의 무의식에 숙의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논한 책입니다. 이제까지와 다름없이 마치 대중의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고, 전문가의 숙의에만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이나 전문가만 밀실에 모여서 정치적인 문제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선거철에만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시대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보급되어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인터넷을 떠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상황을 감안해서 정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지, ‘대중의 의지에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브로고스BLOGOS’라는 언론 사이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은 오사카시의 하시모토 시장입니다. 그는 포퓰리즘적인 언사를 동원해서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시모토가 내건 정책 중에는 부분적으로 제가 지지하는 내용도 있지만, 반대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일반의지2.0은 이러한 포퓰리스트의 전제적 성향을 억제하는 장치로도 기능합니다. 포퓰리스트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까닭은 결국 선거의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4년에 한 번 선거가 이루어지고 그때만 반짝 지지를 얻으면, 그 후 4년 동안은 거의 독재와 다름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지2.0이 기능하게 된다면 항상 대중의 욕망이 가시화됨으로써 포퓰리즘이라는 현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구상은 ‘대중주의 대 선량주의’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안 : 많은 희생을 치른 후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민주화와 사회의 대전환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라는 식의 과도한 기대를 품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의사 결정 제도이기 때문에 모든 기대에 답할 수는 없으며, 한국 사회는 정치에 대한 기대와 환멸 사이를 왕복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한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최장집은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좌절,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누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자체가 미완성이라는 관점도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했을 때 ‘소통 없는 의사 결정 회로’를 민주주의 제도 안에 도입한다는 이 책의 제안에 위화감을 느끼는 한국의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즈마 : 일본에서도 민주주의는 고귀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통 없는……”이라는 주장에 즉각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결정에 참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시간, 경제, 능력 등의 이유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어서 정치적인 결정 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의 한계를 타파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평범한 시민이 블로그를 개설해서 한국의 대선 혹은 일본의 미군기지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상당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며,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정해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짜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 참여라고 해봤자 단순히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정책을 모두 지지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지하는 정책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정책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 시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의견의 분포 양상과 실제 정치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학생운동이 고조되어 정치의 시대를 맞기도 했습니다만, 1970년대 이후 정치의 존재감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시기에 경제 발전이 계속되어 1990년대까지 경제 성장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다양화를 이룬 덕에 그리고 한국의 국가보안법처럼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한때 일본은 정치가 전혀 필요 없는, 경제적 풍요와 이를 배경으로 한 문화적 다양성만 추구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행복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으로 인한 부정적인 유산 또한 남아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지금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조차 잊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환경이 주어져도 어떤 식으로 의견을 표명하면 되는지 모릅니다. 일반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참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자민당 등 기존의 당 조직은 각각 특정 산업이나 조직과 연계된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 일반 시민의 의견은 정당에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편인 시민운동 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사회 안에서 특수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반 시민이 자연스러운 형태로 정치적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회로가 사라지다시피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를 들어 트위터 같은 매체를 이용하면 140자 정도로 매우 손쉽게 ‘이 정책이 좋다’ 혹은 ‘저 정책이 좋다’는 식으로 의견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소셜 미디어는 이전에 비해 급격히 정치화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오이(大飯) 원전 재가동 문제(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일본에서는 가동 중이던 모든 원전을 순차적으로 정지시켜 현재 모든 원전이 가동을 정지한 상태이다. 하지만 여름의 전력 소비량이 발전 가능량을 웃돌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원전을 재가동할 것인지의 여부를 두고 일본 사회 내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제일 먼저 재가동 여부를 결정하게 될 원전이 오오이 원전이다.)를 둘러싸고 매일 반대/찬성 트윗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원전 문제 전문가인가 하면 사실은 대부분이 아마추어, 즉 평범한 시민들이며, 트위터에 쏟아지는 내용들 또한 아마추어의 재잘거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마추어의 재잘거림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야말로 건전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과제는 전문가가 논의를 거듭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정치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정치의식이 그다지 없는 사람들,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부담 없이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회로를 다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이 책의 구상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본어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이 문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어쩌면 일본 특유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달성한 후 정치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치가 기능하지 않아도 경제와 문화는 풍요로운 상태를 2~30년간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치 공간을 어떻게 다시 재건할 것인가? 일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이것입니다. 쉽게 말해 <일반의지2.0>은, 일본 사회에는 정치적인 숙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에 숙의를 에워싼 재잘거림의 공간을 만들어 공공 공간을 재건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제안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할지 아니면 도래하지 않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서양적인 주체성에 입각한 정치 모델,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주체의 입장에서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서로 토론을 거치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 모델은 서양 고유의 전통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적어도 일본 사회는 그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 : <일반의지2.0>은 ‘일반 시민이 부담 없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자’는 문제의식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정치의 모든 부분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라는 위기의식이 포개진 지점에서 쓰인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아즈마 : 정리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이 결정한다’는 인민주권의 이념입니다.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선거로 일정 기간 민의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 그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대의제 민주주의입니다. 근대 민주주의는 이 수단을 채택했지만, 원리상 인민주권의 실현 방법을 꼭 대의제 민주주의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거라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인민이 원하는 것을 가시화해서 ‘인민이 정하는 회로’를 만들고 이를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한다면 인민주권은 강화될 것입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또 하나의 회로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6. 마치며
아즈마 : 언뜻 보면 제가 매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사유해온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1971년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생각할 법한 내용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양면성이 제 사유의 알기 쉬운 부분임과 동시에 알기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아마도 제 사회사상의 근간에는 일본이 버블을 경험했던 시대의 ‘정치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문제없어’라는 감각이 있으며, 이 감각을 존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감각은 2010년까지도 일본 사회 전체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일본인들은 ‘정치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확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치나 정치인은 제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정치인이 되면 1년 중 100일은 운동회, 경로회 등 지역구의 자잘한 모임에 얼굴을 비쳐야만 합니다. 주민들의 자질구레한 불만이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따분한 직업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저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점은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정치 분야에 모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흠이 있다 하더라도 좋은 인재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면 정치는 기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전제 자체가 붕괴되었고, 정치는 그 고귀한 위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안 : 지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본에서 정치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한국에서 정치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사회를 양분하는 갈등이나 대립이 분출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즈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의 정치는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갈등이나 대립이 부재한 상태에서 꼼꼼하게 자질구레한 의견 조정을 해가는 활동처럼 느껴집니다.
아즈마 : 그렇습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몇 십 년 동안 ‘조정’이 정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 책의 주장이 나왔습니다. 과거에는 일본에도 사회를 양분하는 갈등이나 대립이 있었지만 어느 시기부터 모든 것이 조정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사회적인 갈등이나 대립은 모두 경제적인 자원 배분의 문제로 환원되었고, 정치는 이를 조정하는 역할만 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정치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배후에는 이러한 일본 정치의 현실이 있습니다.
안 : 긴 시간 동안 여러 질문에 성실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인터뷰가 <일반의지2.0>을 이해하기 위한 입구로 그리고 아즈마 씨의 철학적 바탕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즈마 : 일본 사람들이 거의 묻지 않는 질문들이 많아서 이번 인터뷰는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일본어로도 남겼으면 합니다. 한국 독자들이 이 책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무척 궁금하군요.
인터뷰를 마치고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근대와 탈근대의 구분을 의식과 ‘의식 외부’의 구분과 연계지어 사유한다는 것에 있다. 각기 차원은 다르지만 인간과 동물, 의식과 신체, 개체와 통계, 고유명과 익명, 작가와 데이터베이스, 메타적 성찰과 즉물적 반응 등 여러 저서에서 아즈마가 사용하는 짝개념들도 이런 구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인간을 이와 같은 양면성이 결합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역자가 보기에 <일반의지2.0>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면, 근대적 모델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탈근대적 모델일 수 있는 ‘일반의지2.0’으로 보완하여 인민주권을 더욱 강화하자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의식과 ‘의식 외부’의 상호 보완을 이루자는 말이다. 인터뷰를 통해 아즈마의 작업들을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철학적 밑바탕이 조금이나마 드러났기를 바란다.
이 책의 내용 자체는 매우 평이하다. 어려운 내용은 거의 없다. 인문 사회학적인 배경지식 역시 대부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발상은 상당히 독특하다. 서로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영역들을 연결해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려고 한다. 그 길이 실제로 만들어질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 길을 만들려는 실천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