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은 필자가 2001년에 출판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의 속편이면서, 현재 일본에서 유통되는 ‘문학’의 한 지류의 전개를 추적하고, 이를 통해 사회와 이야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독립된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의 논의는 대략적으로는 전작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단독으로도 읽힐 수 있게끔 집필되었다. 전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논의를 따라갈 수 있도록 언어 구사나 논의의 순서에 최대한 배려를 했다.
  그렇더라도 독자의 당혹감을 줄이기 위해서는 역시 예비적인 설명을 덧붙여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작을 읽은 분들에게는 약간 따분할지도 모르지만,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정도만 확인해두고 싶다.

 

포스트모던과 오타쿠
먼저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전작과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오타쿠(オタク)’의 위치이다. 이 책은 지금 기술한 것처럼 현대 일본에서 유통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순문학도 일반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설도, 또 영화나 드라마도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에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쿠타가와 상이나 나오키 상과도 관계없고, 문학평론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는 많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기회는 없었던,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든지 또 그 주위에서 성장하는 컴퓨터 게임이다. 이들 장르는 각각 ‘라이트노벨’ ‘미소녀 게임’이라 불리고, 독자층은 ‘오타쿠’로 불리는 서브컬처 집단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요컨대 우리들이 여기에서 검토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문학상 수상작이나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거기에 비해서 가볍고 마이너적이고 독자층도 한정된 오타쿠들의 문학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부제가 ‘오타쿠로 본 일본 사회’였다면, 그에 준해 이 책은 공교롭게도 ‘오타쿠로 본 일본문학’이라 불러야만 할 내용이 되었다.
  이렇게 범위를 한정함으로써 일부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일본사회를 고찰하는 데 오타쿠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동의를 얻기 쉬울지 모르겠지만, 일본문학을 고찰하는 데 오타쿠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꽤 당돌하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전작의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작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타이틀이 시사하는 바처럼 포스트모던과 오타쿠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 분석서였다.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모던화(化)’는 1970년대 이후 여러 선진국에서 생겨난 사회적 변화를 의미하며, ‘오타쿠’라는 것은 같은 시기 일본에서 성장했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핵심으로 하는 취미 공동체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던도 오타쿠도 일본에서는 유행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원래의 의미로 돌아가서 살피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포스트모던화의 진전과 오타쿠의 출현은 시기적으로도 특징적으로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오타쿠에 대해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사용하고, 또 반대로 포스트모던에 대해 오타쿠의 경험을 참조하여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일본 사회론에서는 여간해서 언급되지 않았던, 전후 일본의 어느 측면이 부각된다. 필자는 전작에서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오타쿠의 행보에 주목하여, 1995년 이후 젊은 오타쿠가 급속하게 이야기에 관심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것(‘모에’萌え,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대두), 그리고 그 변화가 단기적인 유행이 아니고 오히려 포스트모던의 철저화, 다시 말해 ‘큰이야기의 쇠퇴’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의 논의는 일단 그러한 상황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들은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에서는 이야기의 힘이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쇠퇴한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는 오타쿠들의 작품이나 시장이 그러한 포스트모던의 성격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표현이나 작품 소비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2000년대 이야기적 상상력의 행방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 일단 그 이야기의 쇠퇴에 가장 가까이 접해 있을 오타쿠들의 표현에 주목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포스트모던과 이야기
다음으로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은 이제까지의 서술에서도 이미 문제가 되었던 ‘포스트모던’과 ‘이야기’의 관계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전작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의 개념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논의에서는 이 용어를 ‘큰이야기의 쇠퇴’ 정도로 이해해도 의미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보충 설명을 해두고 싶다.
  포스트모던화는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큰 이야기’의 쇠퇴로 특징지어진다. 18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 지속된 ‘근대’에 있어서 사회 질서는 큰 이야기의 공유, 구체적으로는 규범의식이나 전통의 공유로 확보되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반듯한 어른, 반듯한 가정, 반듯한 인생 설계의 모델이 유효하게 기능하고, 사회는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기 결정이나 생활양식의 다양성이 긍정되고 큰이야기의 공유를 오히려 억압으로 느끼며, 각각의 감성을 강조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그런 흐름이 명확해졌다. 이것이 전작과 이 책의 전제인 시대인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대인식을 제시하면 반론이 따라온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에서는 큰이야기가 쇠퇴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큰이야기가 각양각색의 국면으로 부활하고 증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던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적으로는 큰이야기의 쇠퇴는커녕 문명의 충돌이라든지 원리주의의 부활마저 문제가 되었다. 일본 국내만 보더라도 민족주의나 전통의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화나 소설을 보더라도 치밀한 설정과 중후한 세계관을 가진 장대한 이야기는 이전과 다름없이 계속 잘 나간다. 화제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오타쿠의 시장에 한정하더라도, 거기에서도 모에의 유행은 일단락되고, 거꾸로 이야기가 부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인터넷은 정치 분석으로부터 컬트, 음모론, 내부고발까지 세계 사람들이 투고한 무수한 큰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요컨대 거시적인 수준에서도 미시적인 수준에서도, 현재의 상황은 큰이야기의 쇠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의 과잉이나 범람이라고 파악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큰이야기의 쇠퇴’라는 표현을 상식적으로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의문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반론은 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스트모던론에서 제기한 ‘큰이야기의 쇠퇴’는 이야기 그 자체의 소멸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아무튼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에 있어서도 근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큰’이야기가 만들어져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다문화주의적 윤리의 토대에서는, 만약 ‘큰’이야기를 믿는다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도 믿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만약에 당신이 특정 종교의 열성 신자라고 하더라도 현대사회는 그 신앙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종교를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다른 신에 대한 관용을 침해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신앙의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포스트모던에 있어서는 전체의 ‘큰’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 중 하나로, 다시 말해 ‘작은이야기’로서 유통되는 것이 허락되고 있는 것이다.(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원리주의다.) 포스트모던론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큰이야기의 쇠퇴’라 부른다.
  따라서 현대 사회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큰이야기의 쇠퇴’론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오타쿠들의 이야기가 설령 내용적으로 기우장대한 기상으로 가득하다 해도, 그것은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에 부합할 수 있도록 조정된 ‘관습화’된 것이고, 그런 고로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용성을 가지고 쓰는 한에 있어서는 그것을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토대인 ‘작은이야기’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용성’은 본론에서 나중에 논하게 되겠지만, 현대 문학을 생각하는 데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포스트모던의 세계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상으로 본론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이 책의 목표에 대해 다루어두고 싶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속편이고, 전작에 이어서 오타쿠들의 상상력을 다룬다. 이 주제의 선택은 지금도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오타쿠를 둘러싼 언론 상황은 전작의 출판으로부터 지금까지의 5년 사이 심대하게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지적할 것도 없이, 오타쿠들의 작품과 시장은 2000년대 전반에 폭넓은 사회적 인지를 획득했다. 2003년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같은 시기에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가 오타쿠적 의장으로 명성을 얻었고, 2004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의 일본관에서는 오타쿠가 특집으로 다루어졌고, 2005년에는 <전차남>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모에’가 유행어 대상 톱 텐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변화는 정치경제의 영역에도 미치고 있다. 이 수년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대한 분석이 ‘쿨 저팬’이나 ‘콘텐츠 산업’ ‘지적재산권’이라는 표현으로 논단지나 경제지의 지면을 점유해오고 있다. 유력 정치가 한 사람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해 언급하고 오타쿠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모으고 있다. 싱크탱크도 오타쿠 연구에 여념이 없다. 오타쿠들이 모인 거리 아키하바라는 지금 일본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거리라고 일컬어지고, 블로그나 SNS 등 200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미디어는 오타쿠적 화제에 친화성이 높다. 전작에서는 우선 오타쿠의 소개로부터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단일한 흐름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거기에는 세대 간 격차를 시작으로 갖가지 차이가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타쿠들의 상상력이 지금 사회의 정식무대에 나타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오타쿠들의 문학을 다루는 이 책의 논의를 그 흐름의 하나로서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다. 본론에서도 다시 한 번 소개하겠지만,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동하여 출판업계에는 라이트노벨에 주목하는 붐이 일어났다.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원고는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에 그 붐의 중심에 있었던 소설지에 연재되었고, 업계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씌어졌다. 필자는 이 수년간 비평가나 연구자라고 하기보다는 더 당사자에 가까운 입장에서 작가를 만나고 편집자와 정보를 교환하고 기획에 참여해왔다. 그때 얻은 지식이나 감각은 이 책의 기술에 흘러들어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확실히 2000년대 전반의 오타쿠 붐, 라이트노벨 붐의 산물이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읽히더라도 그것대로 자극적이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씌어졌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논의에서도 명확해진 것처럼 이 책의 중심은 그러한 유행의 소개나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관심은 오타쿠들의 특수한 문화를 특수한 문화로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특수성에 깃든 보편적 문제를 추출하는 것이다.
  다른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필자의 관심은 오타쿠라고 하는 공동체나 세대집단의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을 통하여 발견되는 포스트모던의 생 일반의 고찰에 있다. 그것은 이미 유행의 문제도 청년문화의 문제도 아니다. 그 문제의식은 오히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동물적’이라 묘사한 포스트모던의 소비자가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세계에 접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전작으로부터 이어져온 복잡하고 그리고 실존적인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필자는 제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유감이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포스트모던의 생(生)과 실존의 문제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의 한편으로는 대단히 시대적이고 풍속적으로 보이는 서브컬처 분석이나 작품 분석이,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보편적으로 실존적인 문제의식에 밑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이 만약 기억해 주신다면, 필자로서는 매우 기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책에서는 몇 편의 소설이나 게임을 분석하지만, 논의의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야기상의 수수께끼나 트릭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폭로해버린 경우도 있다. 이른바 스포일러이지만, 그것은 특히 제2장에서의 과 <쓰르라미 울 적에>의 독해에 있어서 유독 현저하다. 그리고 그 스포일러는 논의의 전개와 깊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해당 부분을 빼놓은 다음 넘어가라고 지시할 수도 없다. 독자는 그 점을 미리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A. 사회학


1. 라이트노벨

우리들은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큰이야기의 쇠퇴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오타쿠의 작품과 시장에서 그 ‘이야기의 쇠퇴’라고 하는 조건이 특히 확실히 나타난다. 서장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이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문학의 현재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혹은 오히려 너무 쉽게 성립해버리는 ‘데이터베이스 소비’적 환경에서 이야기는 어떠한 형태로 살아남을 것인가. 그리고 이야기의 그 새로운 형태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가.
  제1장에서는 두 개의 물음을 축으로 하여 몇 개의 새로운 개념을 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제2장에서는 그들의 개념을 이용하여 포스트모던하고 오타쿠적인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싶다.

 

2000년대의 ‘재발견’ 붐
그런데 처음에 서술했다시피 포스트모던의 문학 상황에 대하여 고찰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는 우선 이른바 순문학이나 일반소설이 아니고,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리는 소설군에 주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무엇인가. 일반적 정의로 그것은 만화적, 혹은 애니메이션적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소설이다. 대개 문고판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근년에는 하드커버로 간행하는 예도 늘고 있다. 라이트노벨에는 많은 종류가 있고 출판사 수도 많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독자에게는 일단 서점에서 문고 매장이나 신간 매장이 아니고 코믹 매장에 가서 그 근처에 펼쳐져 있는 패키지로 된 문고본을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것이 전형적인 라이트노벨이다.
  라이트노벨의 기원은 1970년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노라마 문고나 코발트 문고는 많은 명작을 냈고, 나중에 라이트노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 라이트노벨의 특징을 결정한 것은 1988년에 창간된 가도카와 스니커 문고와 후지미 판타지아 문고라고 일컬어진다. 소설가 신조 가즈마(新城カズマ)는 <라이트노벨 ‘초(超)’입문>에서 간자카 하지메(神坂一)가 <슬레이어즈!>를 출판한 1990년을 “‘협의의 라이트노벨’의 발전 방향이 확정된 원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는 호칭이 생긴 것도 그 시기이고, 그 이후 라이트노벨은 일반적 문예로부터 벗어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시장과 제휴를 계속해, 1990년대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2007년 봄의 시점에서는 다수의 출판사가 끼어들어 라이트노벨의 상표는 3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주변에 보통은 라이트노벨로 분류하지 않지만 내용적으로 가까운 작품을 다수 출판하고 있는 레벨(고단샤 노벨스나 하야카와문고 JA 등)이나 라이트노벨 스타일을 차용한 포르노 소설의 레벨(미소녀 게임의 라이트노벨화가 많음), 게다가 그것도 통상은 라이트노벨과 구별되지만 독자층이 겹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미소년 동성애 소설 레벨(보이스러브)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라이트노벨은 양질의 작품을 다수 산출해왔지만, 그 작품 세계가 기존의 소설이나 비평의 틀에 수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정된 평가를 얻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필자는 1999년에 전국지 문화부 기자에게 가도노 고헤이(上遠野活平)의 작품을 소개한 일이 있다. 당시 가도노는 베스트셀러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었고 젊은 독자의 사랑이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 기자는 가도노의 이름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시리즈의 레벨이 있는 덴게키문고(電擊文庫)의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았다. 1990년대 말의 신문 문화란의 인식이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2000년대에 들어서 급속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서장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오타쿠적 엔터테인먼트 일반을 향한 사회의 주목 상승이 있었다. 특히 거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이 라이트노벨이 훌륭해!><라이트노벨 완전독본><라이트노벨☆난도질> 등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친 해설본의 잇따른 출간이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라이트노벨의 인지는 확장하여 일부 작가는 문예지나 소설지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독자가 라이트노벨을 전혀 읽지 않는데도 ‘라이트노벨’이라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면 그것은 필시 이 상황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라이트노벨의 대두는 2000년대 전반의 일본 출판계 전체에서는 큰 주제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라이트노벨․게임은 실제로는 시장의 성장에 의지했다기보다는 업계내의 라이트노벨 ‘재발견’ 붐이라는 현상에 의해 대두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라이트노벨의 역사는 길고 2000년대 이전에도 그 시장은 충분히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라이트노벨이라고 경시했던 양질의 작품이 이것을 계기로 널리 읽혀 회자된다면 당연히 기쁠 것이다.

 

라이트노벨은 ‘장르소설’이 아니다
그러면 라이트노벨은 어떤 소설인가. 내용면에서 추적하자면 라이트노벨의 설명은 대단히 어려워진다. 필자는 여태까지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지만, 그것은 정확히는 장르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서점에서 여러 책을 뒤적거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라이트노벨의 레벨에는 SF나 미스터리, 판타지나 전기(傳奇), 러브코미디 등 갖가지 장르소설이 혼재되어 있다. 한 사람의 작가, 하나의 작품 안에 복수의 장르가 혼재되어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가도노 고헤이는 2000년에 도쿠마 듀얼문고에서 <우리들은 허공에서 밤을 본다>를, 고단샤 노벨스에서 <살룡사건(殺龍事件)>을 출판하고 있다. 각각 다른 시리즈의 제1권으로서, 전자는 미래 우주전쟁과 현대 고교생활이 착종하는 이야기, 후자는 이계를 무대로 한 밀실살인의 이야기다. 전자는 SF와 청춘소설의, 후자는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융합으로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와 같은 장르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도노 고헤이의 독자는 덴게키문고에서 나온 학원 판타지인 『부기 팝』 시리즈로부터 시작된, 어느 작품에도 일관된 스타일을 감지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세 시리즈는 세계 설정 면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의 세계관이나 필치가 장르를 횡단하는 일과 같이 계속되는 것은 라이트노벨의 큰 특징이다.
  미스터리나 SF는 자주 ‘장르소설’로 불린다. 그 명칭은 장르의 차이가 독자층이나 유통 경로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스터리의 레벨에는 일반적으로 미스터리밖에 수록되지 않고 SF의 레벨에는 SF밖에 수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라이트노벨의 레벨에는 미스터리도 SF도 구별 없이 수록되고 있다. 신조 가즈마도 자신의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 특징은 라이트노벨이 미스터리나 SF와 같은 ‘장르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스터리나 SF에는 독특한 규범이 있고 자주 ‘이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다’ ‘이것은 SF가 아니다’라는 논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라이트노벨에서는 그와 같은 규범이 관찰되지 않는다.

 

라이트노벨적인 것
라이트노벨을 규정하는 내적 기준이 없다면, 그 범위는 외적 요소, 결국 레벨이나 패키지로 정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가도카와 스니커 문고나 후지미 판타지아 문고에서 출판한 것이라면 라이트노벨, 표지에 캐릭터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면 라이트노벨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 필자가 현역의 라이트노벨 작가나 편집자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판단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기준도 현실에는 그다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재는 라이트노벨 이외의 레벨로부터 출판한 소설이 독자에게 ‘라이트노벨적 소설’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장 알기 쉬운 예가 2002년에 <잘린 머리 사이클>로 데뷔하고, ‘헛소리’ 시리즈로 인기작가가 된 니시오 이신(西尾維新)일 것이다. 니시오 이신은 현재 라이트노벨 붐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그 시리즈는 <이 라이트노벨이 훌륭해!>의 2005년도판 작품 랭킹 1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작품은 2007년 봄의 시점에서 (한 편의 노벨라이스를 제외하고) 전부 고단샤 노벨스, 더러는 고단샤 Box로부터 간행되었고, 전형적인 라이트노벨의 레벨로는 한 작품도 출판되지 않았다. 표지를 장식하는 일러스트도 애니메이션적 필치로부터는 많이 벗어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반드시 예외적 현상인 것은 아니다. 니시오 이신의 활약은 1990년대의 모리 히로시(森博嗣)나 세이료인 류스이(淸涼院流水)에 의해 준비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모리 히로시나 세이료인 류스이의 소설은 라이트노벨로 볼 만한 것이 많지만, 당시는 미스터리로 출판되었고 특히 일러스트도 더해져 있지 않았다.
  동세대를 보더라도 니시오 이신의 주위에는 같은 고단샤 노벨스에서 데뷔한 후에 문예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토 유야(佐藤友哉)와 마이죠 오타로(舞城王太郞)나, 2001년 가도카와 서점에서 데뷔해 의 만화화로 폭넓은 인기를 얻은 다키모토 다츠히코(瀧本龍彦), 라이트노벨 출신으로도 근년에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는 오츠 이치(乙一), 미소녀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면서 소설도 발표하고 있는 나스 기노코(奈須きのこ)라고 하는 개성적 작가가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는 라이트노벨 작가로 불리지 않지만 그 독자는 확실히 니시오 이신과 겹치고 있으며, 또한 라이트노벨의 레벨로 출판된 작품과도 겹치고 있다. 요컨대 현재 라이트노벨 붐은 그 중심에서 라이트노벨의 외부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장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된 원고는 2003년에 창간된 <파우스트>라고 하는 소설지에 연재된 것이었다. 이 잡지에는 확실히 니시오 이신이나 사토 유야, 마이죠 오타로, 다키모토 다츠히코 들이 기고하고 있었고 라이트노벨 그 외부 경계 영역에서 독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잡지를 라이트노벨 잡지로 부르는 것이 당연한지 어떤지 독자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에 얽매이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현재 일본에는 미소녀 게임이나 보이스러브 소설로부터 협의의 라이트노벨을 거쳐, 미스터리나 SF 같은 장르소설이나 순문학 일부까지 연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일정한 감성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막연히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리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우선은 그 현상인식으로부터 마땅히 출발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