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나와 노동하는 수미에게
여기 지도가 있다.
어서 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으로 가라.
철학자 김상봉은 "왜 기업의 사장은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란 하나의 질문을 두고 20년 높게 고심했다. 소유와 경영의 문제에서 시작한 이 질문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원리인 주식회사를 사유의 중심으로 삼아 자본주의와 삶을 넓은 지평에서 살펴볼 철학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고, 전문경영인이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게 맞다는 경영학자와 경제학자들의 반복된 답변에서 벗어나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머리말과 마지막 꼭지를 미리 공개한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머리말]
이 책을 하나의 깃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크게 세 가닥의 실로 짜여 있다. 하나의 실은‘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라의 대통령을 국민이 뽑듯이, 또는 국립대학의 총장을 학교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종업원들이 뽑으면 안 되는가? 다른 실은‘ 대답’이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동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식당 사장을 선거로 뽑자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런 사정은 순수한 개인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기업이란 기업주의 사적 소유 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면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에 신설하자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세 번째 실은 어떤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근거’들이다. 나는 다시 이 근거를 부정적인 근거와 긍정적인 근거로 나누어, 먼저 주식회사만의 고유성으로부터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을 노동자 경영권의 소극적 근거로서 제시한 뒤에, 기업 공동체의 이념으로부터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적극적 근거를 이끌어내려 하였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근거, 이 세 가지 실로 천을 짜면서 맨 마지막에 새겨 넣은 말은 이것이다. -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누가 쓰지 말라 해도 어떻게든 이 책을 썼겠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3년 전 이맘 때 내가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소위원회의 위원장 직책을 맡은 것이었다. 전문(前文)과 본문(本文)으로 이루어진 강령에서 본문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초한 문서를 강령소위에서 다듬은 것이었으나 전문은 당의 이념을 담은 지극히 철학적인 문서로서 그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 일에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강령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강령이“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구호가 몽상적인 헛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강령을 처음 기초할 때, 강령제정에 참여했던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으니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당 차원의 토론도 실천도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당의 생존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으로 날밤을 새다가 당의 대표를 지냈던 사람들이 당을 버리고 떠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당의 깃발을 만든 사람으로서 당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었던 나는, 내가 기초한 강령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왜곡된 재벌경제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극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작동하는 재벌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철학자가 자기와 직접 상관도 없는 주식회사의 경영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은 학문적 월권이나 일탈이 아닌가? 혹시라도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까 하여, 대답 대신 서준식 선생의『옥중서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원래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은 그것이 현존의 사회질서 속에 특정한 분야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지만, 요컨대 경제학이 현존질서 속에서 경제현상이라는 대상을 차지하고 정치학이 정치분야를 갖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철학은 현존 사회질서 속에 그 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철학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 질서 속의 일부가 아니라 그 현존질서 전체, 즉 그‘ 통째’이다. 따라서 다른 분야의 학문이 자칫하면 현존질서 전체를 주어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과 달리 철학은 현존질서 전체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정면에서 문제 삼게 되며, 때로는 잘못된 현존질서 속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과 대등한 처지에서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을‘ 세계관의 학문’이라 부르는 이유이고, 철학이 다른 학문분야들의‘ 통괄자’로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유이며, 그리고 나아가서는 역사 속에서 철학이 많은 박해를 받아온 이유이다.
철학은 언제나 세계 전체 또는 존재 전체를 생각하는 보편적 학문이다. 당연히 철학이 탐구해야 할 그 전체 속에는 경제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하는 주식회사 역시 하나의 존재자로서 철학적 성찰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철학자라면, 경제・경영학자나 법학자와 달리, 주식회사를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성찰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이나 경영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주식회사의 가장 이상적인 경영 방식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들이라면 주식회사에 관계하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법적 권리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주식회사법의 정당성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법학자들은 주식회사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식회사의 법적 권리균형의 측면에 대해서 치열한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문제되는 한에서만 주식회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무엇을 보든 존재(存在)에서 무(無)에 걸쳐 있는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그것의 존재 의미와 진리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주식회사를 성찰하는 경우에도 철학은 그것의 경제적 측면과 법적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등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측면을 두루 살펴,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그것의 의미와 진리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주식회사 역시 이처럼 철학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그 의미와 진리가 비판적으로 되물어지는 한에서만, 삶의 총체성의 지평 속에서 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고 제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준식 선생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철학은 주식회사를 위해서도 그 존재의 본래적 진리를 드러내고 그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고 또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자 존재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하이데거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말한 것에 맞서, 주식회사야말로‘ 존재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이다. 노동자가 존재하는 장소는 회사이다. 그리고 모든 회사들 가운데서 가장 지배적인 회사가 주식회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존재의 진리를 묻는 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의 진리를 묻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철학자인 내가 주식회사의 본질을 물었으나, 나는 이 문제가 나처럼 보잘것없는 학자에겐 버거운 과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다른 훌륭한 학자들이 묻지 않았던 까닭에 할 수 없이 이 물음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허술하고 빈 구석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러 해 동안 준비를 하고, 지난겨울 집중적으로 책을 쓰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려 애쓰기는 했으나, 내 말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으며, 그러므로 경영권은 그 자체로서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노동자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말을 꺼내면, 진보적인 학자들조차 흘려듣거나 아니면 마치 지동설을 처음 듣는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 꼭 한 번 내 생각을 듣고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반론을 펴면서 장시간 토론해준 경제학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배재대학교의 김진국 교수이다. 지난여름 그와의 토론 후 나는 이제 내 생각을 책으로 옮겨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회사법의 전문가인 전남대 법대 정영진 교수는 원고를 읽고 친절하게 자문해주었다『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 변호사와는 책을 쓰기 전부터 생각을 나누었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도 수시로 원고를 보내 자문을 청했는데 그 분의 호의적 관심과 흔쾌한 동의가 내겐 대단히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강화도의 박진화 화백은 노동자 경영권을 두고 기업인들과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 역시 내겐 확신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생 대안포럼〉과 진보신당 학생위원회의 〈적록포럼〉에 초청받아 노동자 경영권을 주제로 강연을 해왔는데, 그 때마다 대학생들의 적극적 관심과 날카로운 질문이 내 생각을 갈고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들과는 이 주제를 두고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지난해 봄 진보신당의 진로를 둘러싼 토론회에 초대 받아 갔을 때 나는 간략하게나마 노동자 경영권에 대해 말을 꺼냈다. 뒷풀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해고되어 힘겨운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이경수 대림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왜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아무도 한 사람이 없었느냐고 물으면서 팸플릿 형태라도 좋으니 빨리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열 명의 학자보다 한 사람의 노동자의 격려가 내겐 더 큰 힘이었다. 그 부탁에 응답하여 처음엔 팸플릿처럼 짧고 읽기 쉬운 책을 쓰려 했으나, 계획과는 달리 책은 점점 더 길어지고 나는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이 책을 한참 쓰고 있던 어느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문득 또 다른 내가 나에게 물었다.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책인데 중학교 졸업한 노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쓰고 있어?’ 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또 다른 나에게 대답했다. ‘요즘은 노동자들도 태반이 대학 나온 사람들이야!’ 또 다른 나는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른 뒤에 내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누구나 곱씹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지.’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없다. 자본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스스로 설정한 첫 번째 기준은 빈틈없는 철저함이었다. 철저성의 원칙이 대중성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이 책을 한 번 읽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두 번 세 번 다시 곱씹어 읽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극히 단순한 말이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하듯이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된다. 이 쉽고 단순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이제 본문을 보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서출판 꾸리에의 강경미 대표와 문부식 선생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금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분들 같은 친구들을 새로 만날 수 있으니, 늙어가는 것도 마냥 서운한 일만은 아니다.
[상상력과 의지를 위한 간단한 준칙]
지금까지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어떤 의미에서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실천적 순서까지 제시했으니, 이제 독자의 지성(知性)을 돕기 위해 내가 더 보탤 말은 없다. 하지만 상상력과 도덕적 의지를 위해서는 하나씩 보태어야 할 말이 있다. 먼저 독자들의 상상력을 돕기 위해 내가 여기서 제시한 주식회사의 모델을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등장한 뒤 지난 몇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길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나 기업의 모델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제시된 바가 없었다. 우리가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델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극복의 당위를 아무리 외친다 하더라도 그 외침이 사람들을 움직이기 어렵다. 아무것도 상상이 안 되는데 나보고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예노동 대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등장할 것이라 말하는데, 과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 어떤 기업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는 말해주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더러는 그것이 코뮌이라 하기도 하고 소비에트라 하기도 하며, 요사이는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이름까지 사용하면서 거기에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만, 나는 나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모든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려보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마르크스 편에서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기업조직은 협동조합이다. 그리고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협동조합이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에 주된 기업형태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소유와 경영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주식회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을 협동조합에서 찾으면서 협동조합과 주식회사를 구별 없이 뒤섞어 말하지만) 협동조합의 모델을 가지고서 주식회사를 혁신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협동조합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오직 주식회사에만 집중한 까닭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노동자 경영권이 실현된 주식회사가 협동조합이 아니라면, 그것은 과연 어떤 조직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독자들이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이다. 가장 이상적이 주식회사의 모델은 오케스트라, 곧 교향악단이다. 서양에서 의외로 많은 교향악단이 주식회사였고 주식회사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 필하모니는 지금은 재단법인이지만 원래 주식회사였으며,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독일라디오(40%), 연방정부(35%), 베를린 정부(20%), 자유베를린방송(5%)이 대주주인 주식회사이다. 그런데 재단법인이든 아니면 주식회사든, 교향악단의 가장 중요한 경영자는 지휘자이다. 교향악단 지휘자들 가운데서는 뉴욕 필하모니의 아르투르 로진스키나 시카고 심포니의 프리츠 라이너처럼 전설적인 독재자들이 드물지 않았다. 그런 독재자들의 이미지 때문인지 마르크스도『 자본』 1권에서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거대 기업의 자본가에 비유했고,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 역시 교향악단에서 연주자들이 지휘자의 지휘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면서 지휘자나 경영자를 선출하느냐 아니냐가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짐작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주식회사든 재단법인이든 아니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된 기관이든 적어도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의 경우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단원들이 선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방식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볼프강 자발리슈를 상임지휘자로 초빙할 때처럼 먼저 경영진이 200명의 세계적 지휘자 명단을 작성한 다음 그것을 교향악단 단원들의 비밀투표에 부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베를린 필하모니가 카라얀의 후임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초빙할 때처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온전한 자율적 선거를 통해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방식이 어떻든 지휘자를 선택하는 것은 단원들의 몫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노직이 마치 교향악단 단원들이 스스로 선출하지 않은 지휘자에게 기꺼이(노예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책에서 말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선출한 뒤에도 단원들과 지휘자들 사이에는 얼마든지 예상치 못한 불화가 생겨날 수 있다. 그들 모두 어른이므로 스스로 불화를 해결해 나가야 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심각한 상태에 이른다면 결국 떠나야 하는 쪽은 지휘자이다. 대개 100명이 넘는 단원들은 객원 지휘자라도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그만이지만, 단원들이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지휘자가 혼자 교향곡을 연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절에 이판도 있고 사판도 있는 것처럼 주식회사에도 연주하는 단원들뿐만 아니라 돈 계산을 하고 경영을 책임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영진이든 지휘자든 주주든 다른 누구든지 간에 오케스트라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연주자 단원들을 삼성이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듯이 다루지는 못한다. 오케스트라의 생명인 연주는 오로지 단원들과 그들이 선출한 지휘자에 의해 자율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교향악단은 설령 주식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단원들 자신에 의해 통치되는 작은 공화국이다.
바로 그런 주식회사가 내가 이 책에서 말한 노동자 경영권에 입각한 주식회사의 모델이다. 다른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교향악단 역시 이윤을 산출하는 노동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연주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생산활동의 계획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을 지휘하는 경영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음악감독, 곧 교향악단의 지휘자이다. 그러므로 그 지휘자를 교향악단의 단원들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식회사의 경영인을 종업원들이 선출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만약 그런 교향악단의 주주라면, 이런 운영체제에 대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연주하는 단원들이 지휘자를 스스로 선택할 때 그들은 가장 뛰어난 화음으로 가장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게으른 연주자들이 있다. 하지만 지휘자는 그들에게 연주 기회를 주지 않을 권한이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그런 연주자들을 해고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연주가 형편없고수익이 오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식을 처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향악단의 단원과 지휘자 모두에게 심각한 경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주식회사가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까닭은 없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 거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구성원이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에 비해 트라이앵글이 아무리 하찮은 악기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트라이앵글을 연주할 사람이 없다면, 그 곡은 연주될 수 없다. 그리하여 오케스트라는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소중한 공동체이다.
모든 주식회사가 이런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주식회사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리가 가장 탁월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장소라면, 모든 주식회사가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넘쳐 흐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다음으로 독자들의 도덕적 의지를 위해 보태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과연 노동자들에게 국가의 시민권을 주어야 하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기를 주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굳이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민은 권력에 참여하여 나라를 스스로 형성하는 자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 걱정이 자기의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직 자기의 입 하나만을 걱정하는 인간이 시민이 될 자격이 있겠는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노동자에게 시민권을 주지 말라고 말했던 까닭이다.
물론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유를 따를 생각이 없다. 아니 도리어 노동자의 시민권을 단순히 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 생산 현장에서 보다 급진적으로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경영권이란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시민권의 확장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과연 노동자들이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려 섞인 물음을 망각한다면, 저 염려가 현실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지금에 이르러 거의 파탄에 이른 노동운동의 실제 상황에 대해서 아픈 말을 더 보태지는 않으려 한다. 하지만 노예로서 지배자와 싸우는 것은 차라리 쉬워도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서 책임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진보 정치권 언저리에서 떠돌았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정치권에서 노동자의 집단적 세력 강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정치는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주체로서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한다.
복수노조가 현실이 된 시대에 과연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이 이 험난한 형성의 과제를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문외한인 나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을 뻔히 앞에 두고도 왔던 길을 계속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우리 모두 낡은 진보와 이별할 때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