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만큼 성공한다>로 한국 사회에 번뜩이는 제안을 하며 본격적인 저작활동을 시작한 김정운 전(前) 교수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며 파격을 선보였고, 이후 각종 방송과 대중 강연으로 머리 스타일만큼이나 발랄하고 독특한 이야기를 꾸준히 전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때 문득 교수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에 열중하던 그가 '에디톨로지'란 개념을 제안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야기를 듣고자 만났지만, 그는 끊임없이 내게 다시 질문을 던지며 '삶과 지식의 편집 가능성'을 둘러싼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다.
늘 그렇듯 선생님 책에 대해서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반응이 엇갈리는데요. 이번 책에도 비슷한 반응이 있던데요.
내용에서는 혁신성을 원하면서 형식의 파괴에는 거부감을 보이는 이중성 때문이라고 봐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자유롭고 편한 걸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정말 그런 삶을 원하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막상 대답이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제가 교수를 그만둘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사상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도, 밥벌이의 구심점이 필요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존경받는, 정년이 보장된 직업에 대한 집착, 이게 없으면 내 인생이 유지가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죠.
교수라는 직업을 떠남과 동시에 한국이라는 생활의 근거지를 떠나셨단 말이죠. 한국 중년 남성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말이죠. 계기가 뭘까요?
일단 화가 많이 났어요. 당시 제 삶에 대해서요. 엄청 바쁘고 돈도 잘 벌고 찾는 곳도 많고, 그런데 이게 재밌지가 않은 거에요. 삶의 주도권을 뺐겼다는 느낌, 아무도 그걸 빼앗아가지 않았지만,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느낌 그리고 소모되어 간다는 느낌도 들고. 저는 기본적으로 비겁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일단 도망을 갔죠. 그런데 도망을 가서 생각을 해보니까, 삶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뭐냐. 답은 간단해요. 싫어하는 걸 자꾸 해서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걸 적어봤어요. 그런데 1번이 뭐냐. 학교에서 학생 가르치는 게 제일 싫은 거에요. 그러고 나니까 양심에 가책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교수를 한 거죠. 그만둔다고 하니 주변에서 정년까지 보장받았는데 왜 그러냐 이래요. 몇 년만 더 있으면 연금도 나오는데 왜 그만둬. 그러니까 더 기분이 나쁜 거에요. 내가 고작 그것 때문에 교수를 하나. 그럼 학생은 뭐냐.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내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난 거에요. 내가 비겁하고 겁이 많으니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겁에 질리면 어느 순간에 확 하고 뒤집는 순간이 있어요. 그렇게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꽤나 후회했죠. 할 때는 멋있었죠. 그런데 뭐 하지 이제. 그만두기 전까지는 그만두는 게 중요한 건데, 그만두고 나니까 고정적인 수입도 없고, 뭘 하고 살아야지,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한 6개월 지나니까 제대로 된 결정이었다. 지금까지 내 삶은 뭔가 잘못됐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떠난다는 행위 말이에요. 세계일주를 한다든지 해외여행을 간다든지, 이런 방식의 시도가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그간 해오던 공부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셨단 말이죠.
공부가 제일 즐거운 거니까요. 한국문화에서 공부의 즐거움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꾸 여행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여행은 일시적이잖아요. 공부하러 여행을 가는 건 정말 재밌어요.
쉼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다는 이전과는 다른 공부에 대한 욕망이었던 거군요.
삶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걸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 그게 즐거운 거죠.
문화심리학,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이전에는 많이 들어보지 못한 말인데요. 이것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문화심리학은 1990년대부터, 발달심리학에서 피아제의 이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유럽의 심리학자들이 인지발달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피아제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거예요. 발달단계에 제때 이르지 못하면 문제라고 보는 건데, 이걸 다르게 본 사람이 비고츠키에요. 그런데 제 지도교수가 비고츠키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거든요. 비고츠키가 남긴 저작을 번역해서 유럽에 소개한 리더가 제 지도교수였어요. 이게 독일에서 벌어진 사회냐, 문화냐 논쟁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전자는 보편성을, 후자는 다원성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문화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인데, 피아제 식 인지발달구조로 설명하면 문화적 차이가 발달 수준의 차이로 설명이 된단 말이에요. 이걸 암묵적으로 우리가 재생산해왔다는 거죠. 문화심리학은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창조는 편집이다.”이번 책의 핵심 문장인데요. 보통 편집이라고 하면 에디팅이라고 하는데, 에디팅과 에디톨로지, 어떤 질적 차이가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네, 질적 차이죠. 물론 에디팅도 창조적인 작업이죠. 어떤 편집자가 작업하느냐에 따라서 책도 전혀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부분을 그간 기술적으로만 이해하고 접근했기 때문에 문제였던 거죠. 스티브 잡스가 창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데, 이전의 관념대로 생각하면 잡스가 새롭게 만든 게 뭐가 있을까요? 없단 말이에요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잘 편집한 거거든요. 마우스로, 터치로 말이죠. 에디톨로지를 한다는 건 메타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줄 안다는 거예요. 창조적 사유는 메타언어를 쓸 줄 아는 거예요. 예를 들면 윷놀이, 떡국, 한복. 이 세 가지를 얘기하면 뭐가 떠올라요?
명절이죠. 설날.
그럼 떡국, 윷놀이, 한복. 이 구체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설날이라고 하는 메타언어를 내가 갖게 되는 거잖아요. 명절, 축제. 이렇게 말이죠. 개개의 정보를 기억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요. 이걸 엮는 메타언어를 내가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걸 한국 사람이 보면 바로 나오지만, 서양 사람이 보면 메타언어가 안 나오잖아요. 이게 문화적인 거죠. 이런 걸 엮어서 우리 머릿속에 구성되는 게 문화적 기억이에요. 이렇게 하면 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생각이 풍요로워지거든요. 이게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거죠. 책 후반부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걸 다루다 보면 태그처럼 정보의 내용이 어느 맥락에 속해 있는지 지정해주거든요. 주소록을 정리할 때도 나이나 직장 이름이 아니라 자기만의 분류 기준을 세울 수 있잖아요. 이게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거예요.
창조라고 하면 전에 없던 걸 만들어내는 걸 생각하기 마련인데, 말씀하신 창조적인 작업은 단순한 작업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그런 생각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창조에 거품이 생긴 거죠.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창조 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창조는 스티브 잡스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런 거지같은 생각이 어디 있어요.
본문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한국사회에서 창조는 전통적 의미처럼 신 같은 전능한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용어가 끼치는 영향도 있겠다 싶은데요.
맞아요. 창조적인 것과 창조. 우리는 창조를 하는 게 아니라 창조 같은 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적이란 말을 쓰는 거죠. 그래서 창조 경제라는 용어는 틀린 거예요.
그런 점에서 편집이란 용어도 생각해봐야겠는데요. 짜깁기라고 할까요.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이런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 않나 싶거든요.
그것도 짚어봐야죠.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인데. 옛날에는 다 짜깁기죠, 편집이고. 다 표절이죠. 그런데 그때는 지적재산권이란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개념이 생기면서 범위를 정하는 데에 기준이 생기니까 짜깁기나 표절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고, 그러니까 창조적인 작업이 더 어려워진 거죠. 그래서 그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위해서 누구나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창조는 편집이다. 이런 선언을 한 거예요. 그리고 이걸 에디톨로지라고 한다. 이게 핵심이죠.
지식의 위계나 권력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에디톨로지라는 개념과 의미, 내용 역시 책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서 전달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네이버 지식인 같은 경우, 그 효용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이를 통해 확산되는 지식의 근거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단 말이죠. 이렇게 볼 때, 여전히 공인된 지식, 검증받은 지식 혹은 검증받은 자가 말하는 지식. 이런 부분은 여전히 존재한단 말이죠.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과도기니까요. 저도 그런 과도기적 상태를 이용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내가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그 근거로서 내가 그간 밟아온 과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미래 지식의 구성 방향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얘기해야죠. 나도 기존의 지식 체계, 지식 권력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만, 내가 교수를 그만두고 대학이 더는 지식 권력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갖고 있는 기능이 끝났으니, 새로운 지식 구성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자. 게다가 한국이 아이티 기술이 발전해 있으니, 이걸 잘 찾아보면 지식의 종속, 지식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생각해봐요. 1년에 천만 원씩 하는 비용을 들여서 듣는 대학 수업이라는 거, 지금 이런 강의 내용, 세계 유수 대학의 강의 무료로 들을 수 있잖아요. 이걸 교수들도 알아요. 이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 이런 얘기에요.
이런 구조적 한계에 대한 고민이 있죠. 그런데 그걸 타파하는 방식이, 현재 대학 구조 안에서는 통섭이라고 표현되는 방식이 최선인 것 같아요. 이런 게 대체로 기존의 구조는 그대로 두고 다리를 놓는 정도의 방식이잖아요.
그런데 다리가 안 생겨요. 서로 갖고 있는 언어 체계가 다르거든요.
그런 시도는 결과물을 내기 위한 목적성이 많이 느껴지는데, 에디톨로지는 결국 재미잖아요. 과도기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지식의 영역에 들어가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출구는 여기에 있다고 보시는 거죠?
이미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 보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는데, 내용과 체계가 정말 놀라울 때가 많단 말이죠. 이런 가능성을 숨 쉬게 해줄 수 있는 제도의 노력이 필요한데, 학문의 틀 내에서는 이게 어떻게 가능할 것이냐, 저는 이걸 고민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제도라는 게 애초 있었던 게 아니라 어느 시기에 만들어지는 거란 말이죠. 만들어졌다고 생각을 하면, 나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주변부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해요. 에디톨로지라는 학문, 이제 시작이니까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누구든지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시작하면서 과정을 거치면서 구조를 갖추고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고 인정받는다면, 어느 때부터는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지요.
저는 지식이란 개념에 관심이 많은데, 지식을 정보와 정보의 관계라고 정의하셨잖아요. 이렇게 보면 결국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하게 되는데, 이렇게 보면 1부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에서 2부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가 자연스레 연결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1부에서는 마우스가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기술적 발견으로 언급되는데, 발상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우연히 그 생각을 한 거예요. 계층적 지식이 파괴되고 네트워크적 지식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게 아니지만, 그걸 가능케 한 게 바로 마우스라는 건, 새로운 생각이죠. 하이퍼텍스트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마우스였던 거예요.
지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요. 지식의 성격을 검증 가능성, 반증 가능성, 편집 가능성으로 구분하고 편집 가능성이 높은 지식이 좋은 지식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앞서 지식을 정보와 정보의 관계라고 정의했잖아요. 이러고 나니까 새로운 지식이 쉽게 만들어진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편집 가능성이 뭐냐. 어떻게 구성되었느냐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어떤 지식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념을 다른 곳에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바로 편집 가능성이에요. 그래서 그 예가 프로이트인 거예요. 프로이트가 왜 위대한 편집자냐. 이드, 에고, 슈퍼에고라는 편집 단위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여기저기 갖다 쓸 수가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지식은 있는 걸 발견해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구성해나가는 거거든요. 찾아내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거라고요.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편집의 가능성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만들어낸 지식의 체계보다 중요한 건 그 체계를 구성하는 편집의 단위 그리고 그 단위에서 생기는 편집 가능성이란 말씀이군요.
맞아요. 그렇다고 모든 곳에 가져다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영역을 펼칠 때 편집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죠.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가 만들어낸 편집의 단위 덕분에 인간의 의식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냐는 말이죠.
2부에서 지도나 원근법 이야기 모두 재미있었는데, 재현의 시대에서 편집의 시대로,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이 부분에서 늘 지적되는 문제가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여전히 이게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요. 개별 단위가 얼마나 확실하게 구성된 것이냐 하는 문제요.
일면 타당한 비판이에요. 그런데 저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과 사실을 연결시켜주는 편집이 그동안 너무 폄하되어 왔다고 말하고 싶어요. 근대가 분류와 사실 확인의 역사잖아요. 분류를 하고 가장 작은 단위까지 확인하면 해결이 될 거라 믿은 거죠. 그런데 해결이 됐나요? 하나도 해결이 안 된 거예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실 자체가 확인이 안 된다고요. 양자역학이 그렇잖아요. 자연과학도 이런데 인문학에서 사실 확인이 가능하겠어요? 다 해석이죠. 그런데 자꾸 진실을 말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실체적 진실을 이야기해요. 사실 자체가 편집의 결과라는 말이에요. 내가 밥을 먹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밥을 먹었다는 걸 왜 기억하죠? 종일 계속 일이 일어나요.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 의미 있는 사실만 뽑아내요. 이런 해석, 편집의 차원이 전제되어야 사실이 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재현의 능력이 전제가 되어야만 창조가 가능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피카소가 기본기가 잘 되어서 창조적인 작업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생각해보세요. 현대미술에서 재현은 이미 끝난 문제잖아요. 사진기가 재현하잖아요. 수공업자가 되어야만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2부에서 공간의 편집도 중요하게 다루시는데, 편집 역시 어떤 목적에서 하느냐가 중요할 텐데, 공간의 문제로 들어오면 지식의 편집과는 다르게 물적 공간을 전제하기 때문에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잖아요.
물론 그런 면이 있죠. 하지만 그렇게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집 인테리어를 왜 해요? 그게 효율과 상관이 있나요? 우리에게는 어떤 욕망이 있어요. 그걸 부정하면 안 돼요. 저는 현실의 즐거움, 실현 가능한 행복을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행복하고 재미있어질 수 있는 공간의 편집에 대해 안다는 건, 말씀하신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고, 또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거라고 봐요.
에디톨로지가 현실에서 구현되고 발현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개인 차원이 우연적 결과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런 개인이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 차원에 대한 고민이 궁금해지거든요.
중요한 건 맞아요. 그런데 제 경험상 그건 운이에요. 제가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제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저는 행복한 심리학과 교수가 되고 싶었을 따름인데, 꼬이고 꼬이면서 이렇게 된 거예요.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말씀하신 사회 차원에서의 조건은 투쟁하고 싸워서 얻어내야 할 영역이에요. 그건 기본권의 문제라고 봐요. 그런데 나한테 왜 그런 목소리를 안 내느냐, 이런 목소리도 있는데, 저는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기본적인 전제가 갖춰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갖춰졌을 때 방향에 대한 이야기도 여전히 필요하거든요. 마치 예술가들이 우리가 또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걸 할 수 있어야 지금 조건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변화를 위한 힘을 모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적어요.
네. 큰 이야기는 정리가 된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기술적인 부분에서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의 가능성과 유연성을 높이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조언 그리고 언어, 중요하지만 많은 이가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인데요.
네, 좋습니다. 우선 언어. 저는 쉰부터 일어 공부했어요. 그래서 <보다의 심리학> 번역도 했어요. 관심이 있으면 하게 되어 있어요. 문화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죠. 관심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를 포기하는 거예요. 그게 외국어가 아니라 해도 무엇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언어가 필요한 거니까요.
관심을 끝까지 추구하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군요. 지금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곳까지 가면 만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런 말씀인 거죠?
맞아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 진짜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되요. 그리고 편집의 가능성과 유연성에 대해서는 기록이 첫째 조건이에요. 습관으로 만들어야 해요. 데이터베이스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에요. 기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갤럭시 노트를 권하는 게, 기록에 있어서 기가 막혀요. 검색해서 나오는 모든 결과를 이미지로 잘라서 바로 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할 수 있거든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도구가 어디 있어요. 친구한테 좋은 글이 와요. 그럼 그냥 잘라내서 저장하면 돼요. 그걸 저장하는 도구는 에버노트구요. 이렇게 데이터를 쌓다 보면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도 생기고, 이걸 관리하기 위해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거든요. 이 메타언어에 익숙해지면 내 이야기를 사람들이 재미나게 듣기 시작해요.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엮어서 이야기하니까요. 이 책도 그 결과죠. 이걸 쓰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축적했겠어요. 데이터를 축적하다 보면 기존의 지식 영역이 설명하지 못하는, 담아내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데, 이걸 엮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에디톨로지도 그런 과정의 결과이고요.
자기의 관심을 끝까지 추구해나가면 내 현실의 문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고, 그걸 과감하게 뚫고 나갈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요. 교수직 따위야 이런 마음도 생길 수 있고요. 제가 유학 다녀왔을 때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요. 저도 교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좌절했는데요.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서 내 진정한 관심을 추구하다 보니까 교수직 따위야, 누구나 관둬, 누구나 은퇴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교수는 정년이 길어서 나쁜 직업이에요. 정년이 길면 새로 시작할 수가 없어요. 빨리 끝나면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데, 교수는 그러질 못해요. 정년이 길어서. 그래서 은퇴한 교수가 제일 불쌍하다고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