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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있는 그림 - 고통과 환희를 넘나든 예술가 32인의 이야기
이은화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월
평점 :
책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기발한 문장을 발견하거나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게 되면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었는지 한탄하게 된다. 한편 이렇게 재미나고 중요한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지냈던 지난 세월이 안타까워 한숨을 쉬게 된다. 이은화 작가의 <사연 있는 그림>을 읽다 보면 앞에서 말한 한탄과 한숨을 자주 하게 되리라. 그리고 우리가 수도 없이 자주 보았던 그림이라도 그 그림에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되면 전혀 다른 그림으로 다가온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다빈치의 <모나 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크지도 않은 이 그림이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고 그토록 비싼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뭉크가 <절규>가 어떻게 해서 그의 대표작이 되었는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사람 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림을 감상만 하면 되지 굳이 사연까지 알아야 하냐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미술 작품이야말로 한 시대를 알려주는 거울이다. 물론 우리는 역사책을 통해서 역사적인 사건의 인과관계나 배경을 알 수 있지만 미술 작품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문화와 관련된 동시대 사람 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알려주기 마련이다.
1770억원짜리 그림을 화장시킨 사람
1990년 5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안. 경매사가 낙찰 봉을 내려치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770억원에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낙찰되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그림값뿐만 아니라 낙찰자 사이토 료에이 일본 제지 회장이 자신이 죽으면 이 그림도 자신과 함께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폴 가셰 박사로 고흐를 마지막까지 돌봐졌던 정신과 의사이자 마음을 나눈 친구였다.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던 고흐는 동생 테오의 권유로 가셰 박사의 치료를 받게 되었고 예민한 고흐는 가셰 박사 또한 자신처럼 우울증으로 시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과 닮은 가계 박사를 평생의 친구로 삼은 고흐는 마침내 그를 모델로 <가셰 박사의 초상>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이 그림의 모델은 누가 봐도 우울한 표정이다. 고흐는 모델의 우울한 표정으로 당대 사람 들의 우울함과 암울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반 고흐 마니아였던 이 그림의 낙찰자 사이토 회장의 유언은 실행되었을까? 정답은 사이토 회장의 유가족만이 안다. 소문만 무성할 뿐 진짜 사이토 회장과 함께 화장되었는지 다른 소장가에게 팔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에는 왜 요람이 비어 있을까?
미술사의 바이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는 700쪽에 달하는 대작이지만 여성 미술가는 단 한 명만 등장한다. 초판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고 1994년에 출간된 독일어판에 케테 콜비츠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새로 추가해야할 여성 미술가가 있다. 바로 18세기 말 프랑스의 궁정화가였던 르브룅이다. 물론 이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본다면 ‘아, 이 그림!’ 하게 될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녀들>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기록이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꼭 구경하게 될 만큼 유명하다. 이 그림 속에 그려진 장남 루이는 요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요람은 비어 있고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다.
원래 이 요람에는 막내딸 소피가 그려지고 있었는데 그만 죽어버렸기 때문에 최종본에서 지워졌고 대신 검은 천이 그려져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다. 이 그림 속에 숨겨진 속사정을 모르고 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또 그림 한 점으로 18세기 마리 앙투아네트의 복잡한 속사정을 간파하는 것은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앙투아네트의 어두운 표정은 2년 뒤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암시라도 하는 듯하다.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제대로 읽거나 쓰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된 교육보다는 그저 공주와 황녀로서 곱게 자란 그녀는 사실 사악하기보다는 다소 철이 없고 동정심이 강했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혁명군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을 때조차 자기 자식 들을 끔찍이 보살피고 아꼈던 평범한 어머니였다. 단두대에 올라가면서 실수로 집행인의 발을 밟은 것을 사과할 정도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이 그림의 모델은 2년 뒤에 죽었지만, 화가 르브룅은 50년을 더 살면서 숱한 명작을 남겼다.
평생 여성만 그린 드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돈 걱정 없이 그림을 그렸던 드가는 부친이 사망하자 경제적 궁핍에 빠졌고 그제야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유독 여성 특히 발레리나 그림을 무려 200점 남겼다. 그렇다고 그가 여성 편력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싸우는 여성을 그리기 좋아했다고 미술사학자 존 리처드슨은 주장한다. <기다림>이라는 작품 역시 목을 앞으로 숙여 아픈 왼쪽 다리를 마사지하는 발레리나가 등장한다. 그런데 발레리나 옆에 엄마로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흥미롭다. 자식이 다리가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손에 든 우산만 바라볼 뿐이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라.’며 자식을 혹독하게 조련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윌리엄 새커리가 쓴 <허영의 시장>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 들이 아이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둔다면, 부모 들이 아이들의 감정을 지배하려고 들지 않는다면, 공부는 좀 덜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 아이 들이 겪는 상처는 별로 없을 것이다. <기다림> 속의 어린 발레리나가 혹시 발레보다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서 현실 세계를 잊고 신드바드와 함께 다이아몬드 계곡을 여행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