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처음으로 글쓰기 비법을 알려준 이는 누나였다. 시를 써오라는 숙제 때문에 ‘영감’을 영접하기 위해서 수행 중인 나에게 ‘집에 있는 시집을 보고 단어 몇 개만 바꾸면 된단다’라는 비법을 알려주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누나의 충고를 그대로 실천했다가 담임선생님에게 무수한 꿀밤을 선사 받았고 문예반에서는 하루 만에 쫓겨났다.
누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모방은 제2의 창작이라는 진리를 ‘과도하게’ 적용한 역효과였다. 혹독한 시행착오를 겪은 나는 좀 더 주도면밀하게 누나의 충고를 따랐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원전을 찾았고 좀 더 많은 단어를 수정했다. 결과는 창대하였다. 동네 교회의 여름성경학교에서 주최한 ‘성경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모방의 글짓기로는 불꽃같은 창작열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순수창작으로 전향했고 더 나아가 글을 써서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1988년 입대를 앞두고 채택이 되면 ‘소정의 상금’을 준다는 주간신문의 광고를 보고 ‘우리나라 정부는 북한보다 훨씬 잘 산다고 자랑하면서 왜 학급당 학생 수는 북한보다 훨씬 많으냐’는 요지의 글을 투고하였다.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후딱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에 학생수첩을 찢어서 휘갈겼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북조선’과 비교하여 비판한 나의 글은 몇 주 뒤 신문에 실렸다. 얼마 뒤 그들이 말한 ‘소정의 원고료’가 1만 원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나의 글씨를 해독해낸 기자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존경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형적인 ‘빨갱이’인 나를 감옥으로 끌고 가지 않은 노태우 대통령의 관대함도 놀랍다. 정체기를 겪었던 나의 글쓰기 실력은 인터넷 언론이 출현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쓰는’ 시대가 아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대가 오면서 ‘악필’이라는 나의 치명적인 단점은 사라졌다.
글쓰기에 몰입한 나머지 소재의 빈곤이 찾아왔고 급기야 힘들게 잡은 ‘말똥구리’를 방생하기가 아까워, 심심하면 다시 데리고 놀 작정으로 말똥구리의 입장에서는 ‘주식’으로 가득 찬 외양간에 두고 사육했다는 요지의 글을 <인류 최초의 말똥구리 사육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관대한 오연호 사장님은 내게 원고료 일천 원을 하사하셨다.
슬럼프에 빠진 나를 격려해준 것은 아내였다. 글쓰기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아내의 충고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즈음부터 다양한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테니스 라켓을 모았고, 절판 본과절판본과 희귀본 책을 모았고, 새벽까지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다양한 사람을 경험하였다.
아내의 충고는 누나의 것과는 달리 효험이 즉각 나타났다. 헌책과 희귀본 수집의 경험을 다룬 책을 냈기 때문이다. 개인의 다양한, 특이한 경험이야말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소재 거리다. 글쓰기 실력은 차후의 문제다. 좀 더 현란한 문장을 쓰고 싶다면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해보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이런 글쓰기를 지향한다. 아니 시도한다. 나는 게으름뱅이이므로 복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모호한 글쓰기 비법은 시도하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따르기 쉬운 비법만을 추구한다. 우선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접속사를 사용하면 문장이 힘이 없어지고 너저분해진다.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앞뒤 문맥을 통해서 충분히 맥락을 이해한다.
<독서만담>을 쓸 때 이 규칙만은 꼭 지킬려고 노력했는데 몇 개나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
두 번째 ‘있다’, ‘것’ ‘수’를 될 수 있는 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들인데 글이 상투적으로 보이게 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닌 것들이다. 시도해봤는데 이 녀석들을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달리 쓰다 보니 오히려 더 어색한 문장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 번째는 부사나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역시 문장의 힘을 떨어뜨리고 진정성을 의심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녀석들이다. 이 또한 실천하기가 어렵고 또 어렵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규칙은 실천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시도를 해보면 결실은 거둔다. 김훈이 예전과는 달리 ‘쌍팔년도’ 식의 서술을 한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했지만 내가 꼭 배우고 싶은 대목이 접속사와 부사,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는 점이다.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기는 비교적 쉽지만 부사와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초보 요리사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어려움과 비교될 만하다.
어렵지만 굳이 시도를 해보라는 이유는 접속사와 부사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문장을 달리 쓰다보면 참신한 문장을 만드는 연습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글이란 없고 다만 단점을 줄여나갈 뿐이다. <독서만담>은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