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대입을 치를 때 면접관에게 욕만 하지 않으면 합격이라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모 여대에 응시했었다. 내 인생에는 재수나 지방대는 없다는 딸아이의 굳은 의지의 표출이었다. 사실 나는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우등생의 상징이었던 모 지방거점 국립대학을 권했지만 인서울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던 시절에 입시를 한 내 의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그 여대 면접관은 대뜸 딸아이의 독서 활동을 살펴보다가 혹시 폐미가 아니냐?’고 묻더란다. 마치 정보기관이 간첩을 색출하는 듯한 뉘앙스였다고 한다.

 

과연 딸아이의 독서 활동에는 여성주의와 관련된 책이 있긴 했다. 딸아이는 특별히 폐미성향은 아니지만, 그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기에 읽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해명할 일도 아닌데 해명이 되고 말았다. 연이어 너 싫어라는 의사를 확실히 품은 공격적인 질문이 이어졌고 딸아이는 최초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며칠 뒤에 서울대 면접장에 갔는데 어찌나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든지 불합격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고 말했더랬다. 모 여대에서 당한 수모와 모욕을 치유하고 왔다나.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서울대 면접관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살짝 기대했지만, 딸아이는 서울대에 합격하지 못했다.

 

나는 이 불합격을 두고 오랫동안 자책했는데 혹시 서울대 자소서 4번 항목 즉 독서 활동란에 손석희 아나운서의 <풀종다리의 노래>를 읽고 기록하도록 권한 것이 실수는 아닌가 생각했다.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불호로 비칠 수도 있는 인물 아닌가. 그러나 <서울대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20>을 집필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서울대는 단 한 명의 지원자가 읽은 책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언론분야를 지망한

딸아이가 기록한 <풀종다리의 노래>가 몹시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니까 이 책을 독서 활동에 기록한 학생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서울대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20>은 대학진학에 유리한 책 목록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요즘 학생들이 관심이 있는 분야와 새로운 생각을 소개함과 동시에 나아가 단 한 명의 지원자가 읽은 책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썼다.

 

그래서 20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반드시 각 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았다. 당연한 일이다. 서울대는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중에서 대놓고 이런 책은 그다지 권할 만한 책도 아니며 좋은 내용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20권의 책을 비판적이고 생산적으로 읽어서 자신만의 독서목록을 찾아 나가도록 돕기 위해서 <서울대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20>을 냈다. 말하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즐거움을 학생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아울러 요즘 것들의 생각이 낯선 어른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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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4-11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여대 면접관 진짜 고소하고싶네요. 무슨 말도 안되는 질문을..... 대학교의 면접관조차 저럴진대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시각은 아직도 아득하게 멀었구나 싶네요.

아참 다시 새 책을 내셨군요. 부지런한 박균호님. 축하드립니다. ^^

2023-04-11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3-04-11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아까 페이스북에서 읽었는데, 서재 들어와서 다시 만나네요. ㅎㅎ

저도 오래 전 어느 대학 면접 보던 날이 기억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가 책이나 시사 문제에 대해
떠들었던 이야기들이 참 부끄럽기만 합니다.

박균호 2023-04-11 13:27   좋아요 1 | URL
그 때야 뭐 다들 그렇지 않겠어요. 면접관님들도 이해하시겠죠 ㅎㅎ

서니데이 2023-04-11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대학교 지원할 정도면 최상위권이었겠어요. 많이 부럽습니다. 학교마다 원하는 지원자 유형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일단 성적이 좋지 않으면 원하는 학교에 원서쓸 기회가 오지 않겠지요.^^
오늘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박균호님 편안한 하루 되세요.^^

박균호 2023-04-11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그냥 뭐 적당히...그리고 결국 떨어지고 다른 학교 갔는데요..ㅎㅎㅎ 서니데이님 언제나 감사해요.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래요.

moonnight 2023-04-12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따님대학(입학식이었나요?@_@;;)방문 때 청소하시는 분들 휴게실 얘기 하셔서 많이 뭉클했었는데요. 저도 부러워요2. 따님이 엄청 수재@_@;;;;;; 조카아이 입시가 다가오니 여러모로 안절부절하네요. 아직 2학년이지만 ^^;

내 인생에는 재수나 지방대는 없다! 라는 따님의 확고한 의지가 멋져요 호호^^

박균호 2023-04-12 19:18   좋아요 2 | URL
아...종교 재단 학교라서 그런지 뭔가 좀 인간적이더라구요. 수재까지는 아니구요 ㅠㅠ 조카아이 입시까지 신경쓰시고 엄청 자상하십니다.

얄라알라 2023-04-1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저는 책 권하는 책을 우선 순위 삼아 찾아 읽진 않는데
따님의 에피소드가 곁들여진 이 리뷰를 읽으니, 갑자기 이 책 꼭 읽고 싶어졌습니다^^
서울대 지원할 일은 없겠지만요 ㅎ

박균호 2023-04-17 08:22   좋아요 0 | URL
아이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