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장거리 운전을 시작했다. 태백교육도서관에 강연하기로 했다. 경상도 교사들끼리 BYC라는 용어를 쓰는데 경상도를 대표하는 두메산골 지역이다. B(봉화), Y(영양), C(청송)를 말한다. 2시간 40분간의 여정이 청송, 영양, 봉화를 거친다. 그러니까 그사이에 BYC를 섭렵하는 셈이다.
과연 명성에 걸맞게 청송 지역을 지날 땐 마치 부탄의 산길처럼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가 길가에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집어삼킬 듯이 버티고 있었다.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는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름답고 오밀조밀한 풍경이 이어졌다. 가는 곳마다 한 폭의 산수화였다. BYC가 왜 양반 동네인지 알겠다. 누구라도 이 풍경을 보고 시 한 수 노래 한 곡이 떠오르지 않기가 힘들겠더라. 여기가 바로 한국의 별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번을 잠시 내려서 풍경을 감상하고 가야겠다는 충동을 참았는데 강가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보고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내려서 한참을 구경했다. 마치 내가 열하일기를 쓰는 기분이었다.
객주문학관을 보았고, 딸아이가 꼬맹이 시절 여행 갔던 송소고택을 다시 만났으며 그림 같은 저수지를 끼고 있는 학교를 보고 감탄을 하였다. 마침내 태백을 만났을 때 박지원이 북경에 도착한 기분을 알겠다. 북경처럼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고즈넉하고 또 고즈넉한 곳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청중을 초대하지는 못해서 강연장의 분위기도 고즈넉했다. 뭔가를 열심히 한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2시간의 강연을 쉬어갈 것인지 아닐지 청중분들에게 물어본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두서없이 이야기했는데, 준비한 분량의 반밖에 하지 않았는데 강연시간은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율리시스>가 어쩌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에 대한 썰을 푸는 것으로 쫓기듯이 강연을 마쳤다. 저번 증평도서관에서도 그랬는데 이제 막 더 재미난 이야기를 해야 하게 된 순간에 강연을 마치게 되었다. 저번도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 ‘아쉽고 또 모시고 싶다’라는 말을 들었다. 본의 아니게 강연을 이어나가는 프로의 수법을 발휘한 것인가?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강의를 마침으로써 또 초청을 받는.
돌아오는 길이 멀고 늦은 시간이라 강연을 까마득히 잊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에 우연히 전날 내 강연에 참석했던 분의 후기를 읽게 되었고 그제야 내가 어제 무슨 엉뚱한 말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존경스러운 분이다. 강연 내내 메모를 했고 정리를 해서 블로그에 글을 올려놓고서야 잠자리에 드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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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6 13: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BYC ㅎㅎ 저 동네 한번 가려면 왠만한 강원도보다 멀어요. ㅎㅎ 근데 정말 경치가 끝내주긴 하더라구요. 저 먼곳을 당일치기로 다녀오시고, 다음날 또 출근하신거예요? 아 정말 대단하세요.
그래도 가신 김에 하루쯤 묵을 수 있는 날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


박균호 2021-04-16 13:59   좋아요 2 | URL
네 풍경이 너무 아름답더군요. 출근때문에 자고 올 수가 없었어요 ㅠ

2021-04-16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6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6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21-04-16 16:18   좋아요 1 | URL
네 격려 감사합니다!!

붕붕툐툐 2021-04-16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읽고 싶었는데 블로그 주소가 빠져서 못 봤어요~ 안 읽어도 멋진 강연이었을 거 같네요!
BYC 나온김에, 저는 C에 산 하나를 가지고 있죠. 훗~ 아부지가 35년 전에 개발되면 엄청 오를 거라고 해서 500만원 주고 사신 땅인데, 지금 시가는??? 두구두구~ 500만원..ㅋㅋㅋㅋ 그 산골이 무슨 개발은.. 한마디로 사기당한 거죠. 그 돈으로 집 한 채나 사두셨음 지금 엄청 부자됐을텐데..ㅋㅋㅋㅋㅋㅋ

박균호 2021-04-16 22:45   좋아요 1 | URL
언젠가는 오르겠죠/ ㅎㅎㅎ 그래도 부러운데요. 블로그 제일 마지막줄 클릭하면 열립니다.ㅎㅎ

그레이스 2021-04-17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의 잘 들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너무 자연스럽게 잘 하시네요

박균호 2021-04-17 15:55   좋아요 2 | URL
아 감사합니다... 오늘 제 인생에 가장 힘든 수업이었어요 ㅠㅠ 엄청 버벅 됬어요 ㅠ

그레이스 2021-04-17 15:55   좋아요 1 | URL
전혀 그렇게 안 보이셨어요

박균호 2021-04-17 16:00   좋아요 2 | URL
앗...그런가요? 아...듣는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ㅠㅠ강의했어요...그래도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